[기획] 김창숙의 며느리 손응교

2025-03-22

1927년 6월 10일 김창숙은 중국 공동조계(共同租界)에서 치질을 고치려고 입원 중에 체포되었다.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 형무소에 복역하면서 옥중 투쟁을 벌였다. 1929년 5월 22일 김창숙은 치질과 맹장염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대전 형무소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대구 김창연 집에서 치료했으나 차도가 없어 6월 8일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로 가서 죽음을 기다렸다. 이 당시 군자금을 모금하였던 동생 김창백(金昌百, 1879~1942)이 김창숙을 만나러 왔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복역하였다. 김창숙은 본가로 가서 치료하다가 8월 29일 대구지방법원 검사장에 의해 강제로 다시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후 대전 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하였다.

김창숙이 대전 형무소에 있을 때, 손후익의 부친 손진인(1869~1935)에게 편지를 보내 둘째 찬기의 혼사를 논의했다. 마침 외삼촌 정수기가 김찬기(金燦基, 1915~1945)를 많아 좋아해서 손진인에게 괜찮다고 해 혼사가 이루어졌다. 김창숙은 손후익의 딸 손응교(1917~2016)를 며느리로 둘째 아들 찬기와 결혼시켰다. 손후익은 1남 4녀를 두었는데 응교는 셋째로 17살 때였다. 찬기는 20살이었다. 손응교는 다른 형제자매에 비해 고분고분하지도 얌전하지 않은 활달한 성격을 가진 아이였다. 그녀는 대문 밑으로 해서라도 바깥에 나갈 정도로 성격이 활달하였다. 그래서 맨날 꾸지람듣고 또 어떨 때 심할 땐 종아리도 맞고 자랐다. 하지만 유교적 전통을 지켜온 집안의 내력을 간직한 인물이었기에 종부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손응교는 한글과 한문 등 언문(言文)을 조부에게 배웠다. 손응교는 시집가기 전에 담 하나를 두고 이웃집에 살던 이관술의 권유로 서울로 가 그의 집에 머물면서 공부한 적이 있다. 당시 그녀는 서울에서 동덕여고에 재학[청강] 중이었는데 집안 어른이 학업을 반대하는 바람에 졸업은 못 하고 중도에 집으로 와 있다가 시집을 가게 되었다. 결혼은 외삼촌[정수기]이 중매를 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손응교가 시집갈 때 김창숙은 대전 형무소에 있었고, 큰아들 환기(1905~ 1927)는 1927년 12월 왜경의 고문 끝에 타계했다.  동서였던 환기의 부인은 집을 나간 상태였다. 1930년 1월 17일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해 진주고보 학생 3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하여 구속됐는데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1월 20일과 21일 양일간 있었다. ‘진주학생만세사건’에 연루된 진주고보 1학년인 김찬기(17세)는 시위뿐만 아니라 과격한 격문을 부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2차 동맹 휴학을 혼자 계획한 혐의로 체포되어 진주검사국에서 3월 5일 기소 결정되었다. ‘가택 침입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진주 형무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4월 13일 진주지방법원 1심 재판에서 김찬기는 유창한 일본말로 자신은 호적상으로 만 14세가 못 되기 때문에 형법상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손응교에 따르면 김찬기는 재판 결과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이 당시의 신문 기사를 13살의 손응교가 읽은 인연이 있었다. 진주고보 1학년에 다녔던 김찬기는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하지만 그의 독립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시절에 김찬기와 김응교는 결혼했다.

1933년이었다. 신랑 얼굴도 한 번 보지 않은 채 손응교는 17살에 친정집에서 결혼하였다. 혼수 기억은 없고 경주에서 대구까지는 차를 타고, 대구에서 하룻밤을 자고 갑바를 씌운 인력거를 타고 성주로 외서 그때부터는 가마를 타고 사도실 마을로 시집을 왔다. 시댁에 오니 가난하여 형편없었다. 김창숙은 독립운동만 하였기에 가정 살림을 돌본 적이 없었다. 그때 손응교는 “세상천지에 종가치고 내 이런 집도 첨 봤다 싶었다.” 그래서 “내 이 집에서는 못 살겠으니까 어데라도 도망을 좀 가야겠다.”라고 생각했다. 당시 김창숙은 대전 형무소에 복역 중이었다. 남편은 광주학생사건으로 징역을 살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하지만 집에는 안 있고 맨날 나가 돌아당겼다. 그래서 신랑 얼굴은 일 년에 한 번 볼까 했다. 시어머님하고 시동생하고 같이 살았다. 그때부터 손응교의 삶은 “독립운동 하는 집에 시집와 잠 한번 제대로 못 잤어”라는 말로 축약된다.

입암 본가에서 결혼식을 한 뒤, 본가에 머물다가 성주 사도실 마을로 갔다. 부잣집 딸로 손에 물도 안 묻히고 살던 응교 입장에서 당시 김창숙의 가세는 절대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시어머니는 연약해 말도 크게 못 하는 어른이었다. 남편은 사회운동으로 집에 있지 않아 시어머니와 시동생들과 같이 생활하였다. 생전 처음 보는 빈촌이었다. 집도 안채와 사랑채뿐이고 논밭도 많지 않은 편이었다. 말이 양반이지 상놈 집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김창숙이 살아있을 때 1년 제사가 17번이나 있었고 묘사는 27번이나 지냈다. 바깥양반은 살아있어도 없는 것 같이 혼자서 준비했다. 일제 때는 밤에 제사를 못 지냈다. 방공문제 때문이었다. 아침에 지내기도 했다. 형사들이 맨날 지키고 있었다. 손응교가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손윗동서는 제기와 숟가락까지 챙겨 집을 가출해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종가집 종부로 살아야 했다.

손응교는 시집간 지 한 달 반 정도 돼서 남편과 함께 대전 형무소로 시아버지 김창숙을 면회 갔다. 인사하려고 보니 김창숙의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심한 고문으로 다리 불구가 된 김창숙이었다. 보통 죄수들은 붉은 옷을 입는데 흰옷을 입고 발도 아무것도 안 신고 맨발이었다. 간수가 업고 나와서 앉혀 놨다. 그녀가 큰절을 올렸을 때 심산은 “집안이 구국 운동을 하다가 몰락되었으니 모든 것을 참고 원대한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면회 후 손응교는 성주로 가지 않고 본가인 울산 입암마을로 돌아왔다. 그때 생각에 “내가 아무래도 이 집에 이래가 못 살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친정집에서는 대전 형무소 면회 갔다가 왔다니까 막 꾸지람하면서 가라고 하였다. 하지만 손응교는 성주로 돌아가지 않았다. 결혼 후 김찬기는 대구로 옮겨 고서점[책점]을 운영하며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 김찬기는 1934년(21세) 11월 5일 러시아혁명 기념일을 앞두고 대구 일대에 뿌려진 격문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34년 12월 6일 김찬기가 석방되자 손후익은 사위 김찬기를 울산 성안동의 백양사에서 요양하도록 소개했다. 1936년 새해가 될 때까지 김찬기는 백양사에 있었다. 이후 김찬기는 경북 왜관에서 사회운동을 하였다. 손응교는 김창숙의 가출옥 소식을 듣고 대구로 갔다. 대구에 살고 있을 때 맨날 형사들이 와서 집을 지켰다. 김창숙의 석방으로 김찬기 부부는 대구에서 살았다.

김창숙은 1934년 10월 25일 일제의 고문으로 복막염에 좌골신경통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 둘째 아들 찬기의 집이 대구에 있어 옮겼다가 1935년 봄, 김창숙의 부인이 식구들을 거느리고 대구 남산동 171번지로 이사하여 가족과 함께 살게 됐다. 대구 집은 손응교의 외삼촌 정수기가 구해준 것이었다. 일천(一川) 정수기는 출옥 당시 고문으로 불구의 몸이었다고 한다. 1936년 2월 2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김창숙은 대구 남산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받았다. 당시 맨날 형사들은 대구 집을 지키고 있고, 손님들이 오면 거지행세를 해서 왔다.

대구 남산병원에서 김창숙은 김재명(金在明)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김재명은 당시 외과수술로 전 조선에서 권위있는 실력자였다. 그는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대구 동산(東山)병원에서 외과(外科) 전담 의사로 13년간 있었다. 1931년 대구 남산정에 남산의원을 개업하였다. 많은 환자가 경북도 내외에서 몰려와 설비와 건물을 확장시켰다. 특히 1935년에는 X광선과를 증설하였고, 1936년 7월에는 김재인 의사를 초빙하여 안과와 이비인후과를 특설하였다.

병원 치료하던 가운데 사돈어른인 백연(伯淵) 손진수(孫晋洙)가 1935년 12월 28일 사망하였다. 만사(輓詞)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경주(慶州)의 손 처사(孫處士)는 스스로 당우(唐虞) 때 백성을 자처하였네. 간결하고 고상하매 세속과 어긋나고 질박하고 강직하매 인(仁)에 가깝도다. 물결 없는 것은 옛 우물과 같고 절개가 있어 곧 가을 대(竹)이러라. 황금(黄金)으로 약속하는 교제를 끊고 마음은 어린애의 진심 그대로네.” 또 1937년 김창숙은 제문에서는 손진수를 “쏠리는 물결에 우뚝 솟았고, 고상한 그 뜻이요, 강직한 그 모양이었다.”, “평생을 결백하여 하자가 없다.”고 평가하였다.

이병길 작가, 지역사 연구가, 항일독립운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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