갔던 길만 고집하는 뱀

2024-09-30

지난달에는 경기도 가평에 있는 유명산에 갔다. 산 사이로 먹구름이 빠르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가을을 재촉하는 찬비가 숲길을 한바탕 세차게 때렸다. 늦여름 비가 멈추자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뚫었다. 비에 젖은 숲길은 길벗들에게 숲길의 텁텁한 흙 내음도 선사했다.

앞서가던 일행 중 한 사람이 짧게 소리친다. “앗! 저게 뭐야?” 돌아보니 대여섯 마리의 뱀들이 숲에서 길로 나와 찬비 맞은 몸을 녹이려는 듯 똬리를 틀고 있었다. 모두 뱀이 징그럽다고 하면서도 뱀에서 좀체 눈을 떼지 못한다.

다니던 경로만 이용하려는 뱀

이런 습성 이용해 뱀 잡는 땅꾼

상황 맞는 유연한 자세도 필요

생각해 보면 지구 상의 모든 생물체는 자신만의 독특한 모습과 행태로 살아간다. 그중 에덴동산 시절 인간에게 처음 말을 걸었다는 뱀은 생김새나 살아가는 방식에 다른 동물에서 느낄 수 없는 강한 개성이 있다. 끊임없이 날름거리는 갈라진 혀, 깜빡이지 않는 눈, 무표정하게 상대를 응시하는 모습, 사지가 없는 긴 원통형의 몸뚱이로 땅바닥이나 수면 위를 문지르듯 전진하는 모습은 뭔가 형언할 수 없는 이질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온몸에 비늘들이 일정하게 배열되어 있어 군사 퍼레이드에서 느껴지는 섬뜩함까지 느껴진다.

그 날 일행은 뱀을 본 후 각자 뱀과 얽힌 추억담을 한마디씩 쏟아냈다. 한 친구는 어릴 적 시골 강낭콩밭에서 쥐가 구렁이와 맞닥뜨린 장면을 이야기했다. “한동안 파충류인 구렁이는 약한 포유류인 쥐를 노려보기만 했어. 쥐는 두려움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목덜미의 털까지 일으키더니 발작하듯 먼저 구렁이를 공격하는 거야. 구렁이는 쥐의 공격을 기다렸다는 듯 쥐의 머리를 삼킨 후 입속에 쥐의 꼬리까지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준 후 콩밭 이랑을 따라 미끄러지듯 사라졌지.”

친구의 말을 유추해 보면 깜빡이지 않는 눈을 가진 뱀이 쥐를 노려본다면 쥐는 곧 지칠 것이다. 그러다 쥐가 눈을 깜박이면 그 순간 쥐에게는 방어에 허점이 생기는 것이다. 사실 뱀이 눈을 깜빡이지 않는 것은 눈꺼풀이 없기 때문이다. 또 뱀들은 탈피할 때도 눈까지 몸 전체를 탈피하는 ‘원피스(one piece)’ 탈피를 한다. 탈피는 입 부분에서 시작하여 삽시간에 미끄러지듯 이루어진다. 시간을 끌다 허물을 벗지 못하면 허물 속에 몸이 갇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는 어린 시절 땅꾼을 따라 뱀을 잡은 경험을 소개했다. “뱀에게는 독특한 습관이 하나 있어. 외출했다 귀가할 때는 언제나 같은 길로 돌아오는 거야. 다른 동물들도 밖에 나갔다 거처로 돌아갈 때는 익숙한 길을 이용하지만, 뱀의 경우는 오로지 오던 길로만 온다고 하네. 땅꾼들은 사전 답사를 통해 뱀의 허물을 눈여겨보았다가 뱀의 귀가 경로를 파악해 둔 후 뱀이 귀가하는 길목에 모기장 같은 망을 일렬로 쳐 놓는데. 귀가하려던 뱀은 늘 가던 길에 망이 처져 있는 것을 발견하지만 늘 같은 방향으로만 가기 때문에 망을 우회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망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게 되지.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땅꾼들은 모여 있는 뱀들을 한 마리씩 침착하게 수거하더라고. 요즘 이런 식으로 야생동물을 잡는 것은 불법이겠지만….”

한마디로 뱀의 심한 경로 의존적(path dependent) 습관은 뱀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한다는 말이었다. 인간사를 보아도 진군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회군이 중요할 때도 있다. ‘오로지 한길!’ 매력적으로 들리지만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는다. 안되면 우회도 해야 한다. 우회하다 보면 뜻밖의 행운을 만날 수도 있고, 뜻밖의 인연을 만들 수도 있다.

평소 알고 지내는 ‘동네 형’ 박승훈씨의 경우다. 삼성전자 무선통신 분야에서 일하는 승훈씨는 부인과 결혼하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는 집사람을 소개팅으로 만났는데 처음 만나기로 한 그 날 커피숍이 너무 밀려 근처 떡집으로 갔습니다. 그곳 테이블은 한쪽에만 의자가 있어 서로 옆으로 앉게 되었어요. 마주 보았더라면 서로 간 보고 긴장했을 텐데 옆자리에 앉아 편하게 이야기하다 곧 사귀게 되었지요.” 커피숍 대신 우연히 떡집에 가서 평생 배필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다. 요즘 우리는 그것을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고 한다.

자신이 가던 길만 고집하면 뱀처럼 목숨을 잃지만 자기 생각에서 한 발짝만 물러나도 남을 움직일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 요한복음 8장 7절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라는 예수의 말씀을 소개한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는 이 말을 땅바닥에 적었다.

만약 예수가 큰소리로 외쳤다면 그의 말은 흥분한 군중들의 목소리에 묻혀버렸을 것이고 예수 또한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그는 소리치는 대신 땅바닥에 조용히 적음으로써 군중을 진정시키고 그의 말에 집중하도록 했다. 훌륭한 리더는 상황을 똑바로 보고 유연하게 대처한다.

곽정식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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