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북한 맹방 알제리 “한국 닮고 싶다”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10-26

1960년은 ‘아프리카의 해’로 불린다.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 지배를 받아 온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 17개 나라가 그해 동시에 독립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17개 신생국 중 무려 14개국이 프랑스 치하에서 벗어난 점은 역설적으로 지난 세기 아프리카를 휩쓴 프랑스 제국주의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과거 아프리카에 있던 프랑스 식민지 대부분이 1960년 독립한 반면 프랑스령 아프리카에서 가장 면적이 넓고 또 정치적·경제적 비중이 컸던 알제리는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62년에야 독립국 지위를 얻었다. 이웃 나라들과 달리 알제리는 1954년부터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엄청난 희생을 치른 끝에 비로소 독립할 수 있었다. 오늘날 프랑스어가 공용어처럼 널리 쓰이는 알제리가 정작 프랑코포니(Francophonie·프랑스어권 국가 공동체) 회원국 가입은 거부하며 프랑스와 대립각을 세우는 데에는 이런 역사적 악연이 자리하고 있다.

북한 지도자들은 대체로 해외 여행을 즐기지 않는다. 김정은 현 국무위원장의 할아버지 김일성(1912∼1994)이 생전에 직접 가 본 나라는 몇 안 된다. 1975년 5월 동유럽 및 아프리카 순방 당시 포함된 알제리가 그중 하나다. 북한은 1958년 프랑스와 전쟁 중인 알제리 임시정부를 정식 국가로 승인했다. 그게 얼마나 고마웠던지 알제리는 1962년 독립 이후 제3세계 국가들 가운데 가장 노골적인 친북(親北) 정책을 폈다. 반면 한국은 적대국으로 간주하며 상종 자체를 기피했다. 1967년 알제리에서 열린 개발도상국 각료 회의 참석을 시도한 한국 대표단은 회의장에 들어가 앉기는커녕 무장 경비병의 감시를 받으며 갇혀 지내다 서방 국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했다. 1973년 “이제 그만 국교를 수립하고 잘 지내자”는 한국의 제안은 알제리 정부에 의해 무참하게 거절을 당했다.

한국을 보는 알제리의 시선이 바뀐 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이후의 일이다.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이 앞다퉈 한국과 수교하는 모습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노태우정부의 북방 외교가 한창이던 1989년 우리 고위급 외교관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알제리에 가서 교섭에 착수했다. 공산권과의 북방 외교 못지않게 아시아·아프리카 개발도상국을 향한 ‘남방 외교’도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였다. 맹방인 북한을 의식해 “영사 관계부터 시작하자”는 역제안을 내놓으며 시간을 끌던 알제리는 결국 1990년 1월 한국과의 대사급 외교 관계 수립에 합의했다. 이후 양국은 대통령들의 상호 국빈 방문까지 성사시킬 만큼 가까워졌고, 이는 무역·투자 확대 같은 경제 교류 활성화로도 이어졌다. 북한은 여전히 알제리의 전통적 우방으로 남아 있긴 하나, 2010년대 이후 양자 간에는 이렇다 할 실질적 협력 관계가 눈에 띄지 않는 실정이다.

사이드 샹그리하 알제리 국방특임장관 겸 합참의장이 이끄는 국방 대표단이 지난 23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이들은 최근 성황리에 열린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ADEX 2025) 참석을 위해 방한했다. 알제리는 아프리카 최대 규모의 군대와 국방 예산을 운용하는 국가로 알려져 있다. 이 점을 의식한 듯 기념관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은 “알제리 대표단이 K-방산의 우수성을 직접 확인하고, 양국 간 방산 협력도 확대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샹그리하 장관은 약 140년에 걸친 프랑스의 식민 지배 그리고 프랑스와 벌인 독립 전쟁 등을 거론하며 “알제리도 한국처럼 역사적 시련을 딛고 세계적 경제 강국으로 발전하길 희망한다”는 답변을 내놓았다고 하니 새삼 격세지감이 든다. K-9 자주포, K-2 전차 등 한국 방위산업을 대표하는 무기들이 ‘검은 대륙’ 알제리에 진출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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