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힘이다] 이름을 불러주는 일

2025-08-01

스물아홉. 대구 중구 종로에 있던 고용센터에서 한글 수업을 했다. 처음엔 조용한 어르신 열다섯 명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고,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교실은 북적이기 시작했다. 서른 명이 넘는 어르신들이 서로의 입소문을 타고 모여들었고, “젊지만 제대로 가르친다”는 말이 내게까지 들려왔다.

수업이 끝나면 어르신들은 삶아온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를 꺼내 함께 나눠 먹었다. 따뜻한 냄새와 정이 담긴 손길이 교실 안을 채웠고, 나는 칠판 앞에서 열정적으로 글자를 가르쳤다. 때로는 목소리를 높여 야단을 치기도 했고, 그 안에서 나름의 스트레스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은 내게 인생의 첫 ‘진짜 수업’이었다. 무료 봉사였고, 왕복 차비로 몇만 원을 받았지만 마음은 매일 꽉 찼다. 내가 만든 교안으로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뜻깊고 따뜻했다.

그로부터 여덟 해가 흘렀다. 결혼하고 아이와 함께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아이를 데리고 다시 ‘학생’이 되어 낯선 언어와 환경 속에서 지냈다. 간간이 재밌었고, 단어 외우기는 힘들었으며, 육아에도 지쳐 있었다. 그런데 매일 아침 어학원에 갈 시간이 되면, 낡은 뜨라이가 집 앞에 도착했다.

뜨라이는 현지에서 트라이시클(tricycle)을 부르는 말로,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개조해 승객을 태울 수 있게 만든 대중교통 수단이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깊은 눈매를 가진 기사 아저씨는 말수가 적었지만 늘 묵묵히 나를 기다렸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빠짐없이 나를 데려다주던 그의 태도와 외모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꼭 닮아 있었다. 대화는 통하지 않았지만 참 정겨운 분이셨다. 옆집에서 놀리듯 말했다.

“Sue 언니, 전용 기사 또 왔어!”

어쩌면 그분 덕분에 낯선 땅에서 조금은 안전하고 편하게 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경험은 내 안에 조용한 결심을 남겼다. 문화와 언어가 달라도 마음은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한국에서 실천하고 싶다는 다짐이었다.

귀국 후 나는 한국어교원 자격시험을 준비했고, 결국 자격을 취득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공공기관이나 교육기관의 일자리는 매우 제한적이었고, 시간강사로 일하기엔 처우가 지나치게 열악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다른 일을 선택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편에는 그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다. 수업을 마치고 함께 나눠 먹던 감자의 온기, 뜨라이 기사 아저씨의 조용한 배려, 글자를 몰라 불안해하던 어르신의 두 손과 시선. 그래서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다. 내년에는 토요일 하루, 그 마음을 품고 봉사를 시작해 보려 한다.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낯설지 않은 한국어와 따뜻한 시선을 건네기 위해.

지금 우리 사회는 다문화 인구가 점차 늘고 있다. 2023년 기준, 다문화 인구는 약 119만 명, 다문화 가구는 41만5000가구로 전체 인구의 약 2.5%를 차지한다. 또한 전국 초·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다문화가정 학생은 약 19만3000명으로, 전체 학생의 3.8%에 이른다.

울산도 예외는 아니다. 초등학교에 2427명, 중학교에 1002명, 고등학교에 410명, 총 4009명의 학생이 다문화가정 출신이며, 이는 전체 학생의 약 3.16%에 해당한다. 2012년 0.42%에 불과하던 수치가 10년 만에 일곱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울산시교육청은 이 변화를 반영해 적극적인 지원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다문화정책학교와 한국어학급, 찾아가는 한국어교육, 체험형 학부모 교실, 다문화교육지원센터 등을 운영하며 맞춤형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북구 가족센터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약 190명의 학생에게 교육활동비를 지원하고 있다. 작지만 꾸준한 노력이 아이들이 사회 안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돕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모두 물어야 할 때다. ‘우리’라는 말속에 다문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포함되고 있는가?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일, 그 단순한 시작이 이 아이들에겐 평생 잊히지 않는 용기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 이름을 부르고 싶다. 또박또박, 따뜻하게.

스물아홉에 처음 나눴던 감자와 고구마의 온기처럼, 다문화가정 아이들과 나눌 한글 한 자 한 자가 그들 삶 속에 작지만 깊은 온기로 남기를 바란다. 그 작은 시작이 우리 사회를 조금 더 다정하게 만들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다시 교실로 돌아갈 것이다.

장하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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