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유학생활을 한 필자는 스스로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사는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아들들 특히 필자와 같이 학문을 하는 큰 아들에게 항시 꿈을 갖고 기도하라고 해 왔다. 한국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필자가 머물던 곳이 브란트(W. Brand) 수상을 비롯해 사민당 간부들이 비밀리에 회의를 하는 곳이라서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웠는데 우리 같은 범인이 그곳에서 상당기간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그 이름을 잊어버렸지만 산 높은 곳에 위치한 그 집 분위기는 한마디로 조용하고 아늑했다. 필자의 방은 매우 청결하고 풍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 침대보와 1인당 4개씩 모두 8개 정도의 수건을 교체해 주는데, 소박하게 사는 우리들로서는 너무 과분하고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샤워를 끝내고 아늑한 식당으로 내려가면 주로 세계 각국에서 온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독일어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영어를 사용했다. 돌이켜보면 비엔나 유학 시절 영국으로 건너가 유명한 피트먼스쿨(Pitman School)에서 발음 연습과 함께 초급부터 고급 영어 과정까지 마친 것이 이러한 국제적인 공동생활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점심식사비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아침식사를 많이 하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맛있는 빵·버터·치즈, 각종 잼, 신선한 우유, 삶은 계란, 햄, 소시지, 따끈한 차나 커피 등을 먹고 마시는 시간과 안사람과 함께 아데나워(K. Adenauer) 전기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저녁 시간은 우리를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게 했는데, 이때가 유럽 연구시절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한 시절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베를린에서의 연구와 자료 수집이 너무 힘들었기에 더욱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시내버스가 필자가 사는 그곳까지 올라오기도 했지만, 산딸기(Raspberry)를 따먹으면서 유유히 흐르는 라인 강을 바라보며 산 아래까지 내려가는 것은 사는 즐거움을 한층 더했다.
산 아래서 우반(Ubahn: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을 지나면 라인 강 바로 위에 자리 잡은 커다란 본 대학 도서관에 이르는데, 도서관이 라인 강안에 있다 보니 그곳에서 장기간 연구하게 될 필자에게 좋은 느낌을 안겨주었다. 본 대학 도서관의 멋있어 보이는 여직원이 “도와드릴까요(What can I help you?)”라고 영어로 묻기에 “독일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Ich kann Deutsch sprechen)”라고 했더니 매우 좋아하면서 필자의 신원을 간단히 조사했다.
그래서 “독일 초대 대통령 에베르트 연구재단의 초청을 받아 연구하러 온 한국 교수”라고 하고 증서를 보여주었더니 더욱 친절해졌다. 독서실에 책상 하나를 주겠다고 하여 기왕이면 심심하고 피로할 때 라인 강을 바라볼 수 있도록 창 옆의 책상을 부탁했더니 그녀는 기꺼이 그렇게 해주었다. 참으로 대단한 친절이었다.
필자 같은 외국인 교수에게 산장과 같은 머물 곳을 제공해 주고, 도서관에서도 왜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 것일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답은 그것이 바로 ‘그들의 지혜요, 문화수준’이라는 것이다. 기왕 많은 돈을 들여 초청한 사람이니 친절을 베풀면 언제 어디서라도 자기 나라를 고맙게 생각할 것이고, 때로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유학 시절에 비엔나 대학생들과 함께 여행을 갔을 때 아테네에서 산 물건을 나폴리 여관에 놓고 시내 구경을 하는 사이 다 털려버렸고, 신고를 받은 경찰은 시간만 끌고 있었다. 지금도 이탈리아인 하면 관광객 물건이나 터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니 우리 국민도 관광객을 괴롭히는 일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는 조교 격인 안사람(훗날 하버드 대학에서는 안사람에게 ‘교수를 돕는 사람’이라는 신분으로 대학 도서관 출입증을 주었다)과 함께 주말을 제외하고는 매일 출근해 유명한 ≪슈피겔≫(Spiegel) 잡지와 독일어 ? 영어로 된 신문과 문헌을 중심으로 “독일인들의 한국전쟁에 대한 관심과 6. 25 한국전쟁이 독일의 재무장논쟁에 끼친 영향”에 관해 연구했다.
이규하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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