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십자각] 음모론을 넘으려면

2025-03-23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천문학적 배상금을 갚아야 하는 경제적 고통과 ‘패배자’의 굴욕감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일부 군 장성은 극심한 수치심 속에서 유럽 최강대국 독일이 패배한 ‘합리적(?)’ 이유를 찾아헤맸는데 바로 ‘등 뒤의 칼(Dolchstoßlegende)’설이었다. 독일은 전장이 아니라 정치인·유대인 등 내부 배신자들에게 뒤통수를 맞아서 졌다는 주장이다. 급기야 독일은 배상금 문제로 화폐를 마구 찍어낸 탓에 빵 하나가 수천만 마르크까지 오르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중산층이 몰락하고 불안이 극에 달한 이때 ‘등 뒤의 칼’ 신화를 내세우며 국민들의 좌절감을 달래준 극우 나치가 급부상했다. 유대인을 중심으로 1100만여 명을 학살한 인류 최악의 비극 ‘홀로코스트’의 씨앗이 발아된 것이다.

과격한 비교일 수 있지만 최근 들불처럼 규모를 키워가는 반중·혐중 시위를 보며 이 역사적 일화가 떠올랐다. ‘등 뒤의 칼’은 독일 군부가 책임을 회피하고자 꾸며낸 ‘허튼소리’였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반중·혐중 시위를 조장하고 있는 ‘숨겨진 진실’들도 비슷하다. 예컨대 중국 국적 학생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 7~8등급을 받고도 의대에 특례 입학한다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교육부에 따르면 전국 39개 의대 중 서울대 등 30개 대학에서 지난 5년간 입학한 외국인 학생은 7명에 불과했다. ‘중국인들이 4월부터 무비자로 대거 입국해 한국을 점령한다’는 주장 역시 법무부가 공식 반박한 가짜뉴스다.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음모론이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는 점이다. 극심한 갈등을 초래하는 이 주장들을 파훼하려면 음모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오해부터 풀어야 한다. 음모론은 ‘이상한 사람들’만의 문제라는 오해다. 음모론은 모든 사회계층에 존재하는 인류사의 보편적 양상에 가깝고 경계하지 않으면 누구나 음모론에 빠질 수 있다. 특히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공포가 클 때 더 쉽게 음모론에 유혹된다고 한다. 예측할 수 없는 위협보다 구체적인 ‘악의 세력’을 적으로 삼아 통제력을 찾으려는 무의식적 방어기제가 작동해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세계를 상대로 ‘관세 전쟁’을 시작한 가운데 ‘12·3 비상계엄’ 사태로 우리 정부가 극심한 리더십 공백에 빠진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음모론에 빠져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서로 다른 신념을 가졌다고 해서 상대가 ‘이상한 사람’은 아니다. 무엇을 믿든 우리는 모두 평범하고 똑똑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전제한 후에야 의미 있는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음모론에 대한 믿음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더 가깝다는 점도 기억하자. 그러므로 무례함은 금물이다. 타인의 사랑을 갈구하는 자가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것은 멍청하기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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