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 전주한지 완산지

2025-06-21

취재차 군산 동국사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대웅전 안에 봉안된 불상의 문화유산 지정여부를 묻자 스님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양식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된 불상인데 근거가 없어 문화유산 신청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동국사의 전신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금강사였다. 군산에 진출해있는 일본인들을 위해 1913년에 창건되어 당시 역사가 백년도 되지 않았다. 역사는 짧은데 법당 안에 봉안된 불상의 양식은 몇 백 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해방 이후 불상을 금산사로부터 이안해왔다고 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사진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금산사 대장전의 불상을 촬영한 사진이었다. 집에 돌아와 사진을 스캔해서 보내드리자 스님은 이를 근거로 불상의 이안과정을 밝혀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받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석가불을 협시하는 가섭과 아난존자의 복장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다. 복장에는 발원문과 함께 많은 불경이 들어있었다. 발원문에 따르면 이 삼존상은 효종 1년(1650)에 조성해 금산사에 봉안했다. 이 발원문의 발견으로 불상의 정확한 조성년도가 밝혀지고, 유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소조석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 일체가 보물로 승격되었다.

△복장에서 나온 『묘법연화경』

복장유물에는 사용하지 않은 한지 수십 장도 함께 들어 있었다. 제작한 지 350여년이 지났지만 한지는 이제 막 만든 것처럼 하얀 광택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복장에서 나온 『묘법연화경』을 살펴보다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쇄에 사용된 종이가 너무나도 얇았던 것이다. 얇다란 종이에 먹이 골고루 먹혀 글자가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불빛에 비춰보니 뒷장이 뚜렷하게 보였다. 요즘 용어로 시스루(see-through)라고나 할까. 이 종이는 말로만 듣던 선익지(蟬翼紙)라는 종이였다. 선익지는 매미의 날개처럼 얇은 종이를 이르는 말이다.

책의 간기에는 ‘만력 14년(선조 19, 1586) 전라도 김제군 승가산 흥복사 개판’이라 적혀있었다. 흥복사는 『묘법연화경』뿐 아니라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불설대목연경』등을 간행했던 사찰이다. 흥복사에서 이러한 불서들을 간행할 수 있었던 것은 판각을 하는 각수와 한지를 만드는 장인들, 곧 장인 승려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국사 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묘법연화경』에 사용된 종이도 이 절의 승려들이 만들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흥복사가 조선시대 전주부 관내는 아니지만 전주부 바로 옆 김제군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이 종이를 전주한지의 사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전주한지는 완산지라 하여 한지의 대명사였다.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전주한지는 고려지를 대표하는 종이였다. 고종 21년(1884)에 전라감영을 방문했던 미국공사관의 해군무관 조지 포크(George C. Foulk)가 지니고 온 지도에도 전주한지에 대한 메모가 지도 상단에 붙어 있다. 이 메모에는 “전라도에 함열·군산창과 법성창이 있고, 전주에서 완산지라는 최상급의 종이가 생산되고 있다”고 적혀있다.

이렇게 유명한 전주한지였지만 남아있는 유물 중 어떤 것이 전주한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조선시대 전라감영과 전주부에서 간행한 서책의 간기를 통해 여기에 사용된 종이가 전주한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전주에서 서책용 한지만을 생산했던 것은 아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주에서 생산되는 종이로 표전 주본 부본 자문 서계 등 외교문서에 사용되는 종이와 표지 도련지 백주지 유둔 세화 안지 등 각종 종이가 생산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근대적 한지제조 기술의 도입

이렇게 종류도 다양하고 명성이 자자했던 전주한지가 조선의 멸망과 함께 서서히 명성을 잃어갔다. 전라감영에 소속된 한지장인들이 우수한 품질의 완산지를 생산하던 감영의 지소는 폐지되었다. 일제는 전주에 제지모범장과 전라북도은사제지견습소를 설치했다. 여기에서 근대적인 시설과 약품을 사용해 손쉽게 종이 만드는 법을 보급했다. 한지생산과정 중 노동력이 가장 많이 드는, 닥을 두드려 섬유질이 물에 잘 풀어지게 하는 고해(叩解) 과정을 비터(beater)라는 기계로 대신했다. 비터는 닥을 잘게 갈아버리는 기계였다. 이렇게 하면 닥을 쉽게 풀어서 사용할 수 있지만 닥섬유가 서로 얽히면서 오랜 세월 견디는 내구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여기에 닥섬유를 부드럽게 해서 섬유질을 추출하기 위해 볏짚이나 콩대, 혹은 메밀대의 재를 내려 만드는 천연잿물을 사용하지 않고 화학약품인 양잿물을 사용했다. 게다가 값싼 펄프까지 섞어 종이를 만들었다. 이렇게 생산된 종이는 값이 싸서 전통한지는 경쟁할 수 없었다. 

△잠자고 있는 전주한지라는 브랜드

일제강점기에 전통 전주한지는 거의 사라졌지만 그나마 전주태지(苔紙)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태지는 가는 이끼의 문양을 넣은 고급스런 종이로 전주 시내에서 지물포를 운영하던 한지상이 개발해 상용화했다. 오목대 아래에서 태지를 생산하다가 1930년대 후반 한옥마을이 조성되기 시작하자 공장을 완주군 구이면으로 이전했다. 이 외에도 전주 인근에서 근대식 한지제조법으로 종이를 만드는 영세한 한지업체가 몇 군데 있었다.

해방이 되면서 한지공장은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전주한지의 유명세를 타고 중국과 만주, 북한 등지로 수출되던 종이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하루아침에 해외시장을 잃었다. 수요부족으로 경영난을 겪던 한지업체에 숨통을 트게 해준 것은 6·25전쟁이었다. 전쟁으로 무너진 집을 복구하면서 종이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전주 흑석골에 한지공장이 들어섰다. 구이로 생산거점을 옮겼던 태지공장이 1955년에 제일 먼저 흑석골에 자리를 잡고 전주제지공업사란 상호로 한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후 문산제지, 호남제지, 문성제지, 평화제지, 우림제지 등이 들어서 1970년대 초까지 호황을 누렸다. 현재는 전주제지공업사를 이어 받은 고궁한지만이 흑석골에 남아 있다. 2022년에는 이곳에 전주천년한지관이 문을 열었다. 이 한지관에서는 전통한지교육을 비롯해 전주한지에 대한 복원을 연구한다고 한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전통 전주한지는 그 맥이 끊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근대적인 제조시설을 갖추고 화학약품을 사용하는 한지공장만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수한 품질을 자랑하던 전주한지가 근대화에 발목을 잡힌 것이다.

전통한지는 내구성에 있어서 세계 제일의 종이이다. ‘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이란 말이 있듯 한지는 천년이 넘도록 보존이 가능한 종이이다. 그 한지 중 가장 명성이 자자했던 종이가 조선시대 완산지로 불리던 전주한지이다. 흔히 얘기하는 브랜드 가치로 치면 완산지라는 브랜드는 대단한 가치를 지닌 자산이다. 이렇게 엄청난 자산이 잠자고 있다. 이를 타개할 방법이 없을까.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손상국 프리랜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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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지 완산지

기고 gigo@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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