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년의 부부는 익숙하다. 그 익숙함이 가구와 같다. 도종환은 그의 시 ‘가구’에서 익숙하고 변화 없는 부부의 일상을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자기 자리에 놓여 있는 집안의 가구’로 비유한다. 가구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 오래 익은 아름다움이 하나라면 익숙함과 권태는 또 다른 의미이다.
가구에 내재한 익숙함과 고정된 자리는 서로에 대한 신뢰로 묵묵하게 부부의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의미한다. 가구는 가족이 살아가는 공간을 채우는 존재로 추억과 삶의 흔적을 나타낸다. 우리는 가구에 기록된 흔적들을 보면서 삶을 반추해본다. 문 옆의 벽에 키를 잰 흔적은 아이에 대한 추억이다. 사진은 빛이 남긴 과거의 흔적이지만 벽에 그어진 줄은 실제다. 그래서 오래된 가구는 삶의 증거이다. 말 한마디 않고 조용히 있지만 우리 곁에 있는 따뜻한 추억이다. 말하지 않지만 말을 건넨다.
돈·일·건강도 중요하지만
최고의 자산은 부부 관계
가구처럼 당연시 말아야

부부도 얼굴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 추억을 공유한다. 얼굴과 몸이 그 시간과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얼굴의 주름과 불편하게 걷는 관절은 가구에 새겨진 여러 상처, 삐걱대는 소리와 같다. 오랜 세월을 같이 산 부부는 영락없는 가구의 모습이 된다. 둘은 익숙하다. 그 익숙함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정(情)으로 산다는 게 이런 뜻이리라.
하지만 익숙함이 좋지만은 않다. 익숙함은 일상적인 무덤덤함이기도 하며, 무덤덤함은 소통의 단절로 이어진다. 시인은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뜻이 통하는 노부부의 모습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소통을 해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구’의 화자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일상의 익숙함과 무덤덤함, 그리고 소통의 부재는 고독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시의 마지막에서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한 공간에 있지만 각자의 고독과 오랜 삶의 무게 속에 부부는 약간의 삐걱거림도 없이 정적 속에 사물처럼 있다.
이처럼 ‘가구’는 노년 부부의 깊이 익은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한편으로 거기 내재된 소통의 단절과 고독함을 보여주고 있다. 단절은 사소해 보이지만 밀도가 높다. 마치 소슬바람 같다. 화자의 가구가 육중하게 어두워지는 이유다.
나희덕 시인은 시 ‘가구’에 대해 “서로에게 익숙해진다는 것은 90%의 편안함과 10%의 쓸쓸함을 동반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 시인은 가구는 가끔은 삐걱거려야 한다고 말한다. 단절한 채 혼자 무언가를 안고 가는 것보다, 오히려 작은 갈등이나 어긋남이 있어야 관계는 계속 움직이고, 서로를 다시 바라보고, 갱신된다는 뜻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삐걱거림은 소통의 몸부림이다.
부부는 같이 묵어간다고 이심전심이 되지 않는다. 말을 해도 소통이 잘 되지 않는데 하물며 마음으로 소통한다는 건 도(道)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이를 일상에 적용하면 안 된다. 더욱이 부부는 오래 같이 살았지만 서로가 이해 못 하는 각자의 깊은 슬픔이 켜켜이 쌓여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긴 세월을 같은 장소에서 부대끼며 살았으니 그 마찰을 줄이려고 속으로 삭인 일이 한둘이겠는가. 이들이 하나둘 쌓여 빽빽하게 되다 보니 압력이 높아져 불이 된 게 울화병(鬱火病)이다. 익숙함으로 이를 덮어버리면 안 된다.
노후에는 돈·일·건강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는 하드웨어에 해당한다. 관계라는 소프트웨어의 중요성도 크다. 오죽하면 ‘관계 자산’이라는 말까지 하겠는가? 여러 관계 중에서 베이스 캠프 역할을 하는 게 부부의 관계이다. 자녀나 사회관계는 점차 옅어지는 반면 부부의 관계는 갈수록 또렷하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에 해당하다 보니 자칫 부부의 관계를 후순위로 밀어 두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노년의 부부가 함께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때는 TV 볼 때라고 한다. TV·소파·부부라는 가구 3형제를 보는 듯하다. 설상가상으로 안방과 거실로 나누어서 TV를 본다. 소통의 원천적 차단이다. 따로 떨어져 제 자리에 오래 놓여 있는 가구가 아닌, 걸어 다니고 말을 하고 가끔 다투고 뒤져 보는 가구가 되어 봄이 어떨까.
도종환의 시 ‘가구’는 추억과 따뜻함의 소재로 노년의 부부를 묘사하지만, 그 이면은 익숙함에 안주하여 서로에 대한 호기심과 각자가 가진 깊은 슬픔을 무시하면 가구는 조용히 그대로 있으면서 짙은 그림자로 육중하게 어두워질 수 있음을 말한다.
연말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수십 년 세월의 연속이 여기에 다 들어있다. 가만히 들여다 보라. 오래전 부부의 모습도 지금에 들어 있다. 그 모습들을 뒤져 보며 삐걱거리기도 해보자. 그러려면 눈 오는 날 밖에 나가서 걷고 식사도 해야 한다.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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