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할머니를 따라 지인 집에 놀러 갔다. 아파트가 많지 않던 시절, 따라간 집이 마침 아파트였다. 어른들이 담소를 나누는 사이 심심해져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문을 열면 마당이 나오는 게 보통인데 기다란 복도가 나오더니, 쌍둥이처럼 똑같은 문들이 연이어 달려 있었다. 운동화를 구겨 신고 복도를 어슬렁거리다 길을 잃었다. 내가 어느 문에서 나왔는지, 여기가 대체 어디인지, 온 세상 대문이 왜 똑같아졌는지 알 수 없었다. 미아가 되어 훌쩍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너 거기서 뭐하니? 얼른 들어와라.” 문이 빼꼼 열리더니 집 주인이 심드렁하게 나를 불렀다. 나는 답을 얻었지만 여전히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 학생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집 앞에서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놀란 마음을 혼자 추스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시인은 길 잃은 아이를 두고 “울음이 창조한 풍선” “어떤 사람에게서 반송된 편지” 같은 처지라 표현했다. 반송된 편지가 되어 우주를 헤매는 심정을 모르는 자가 있을까? 아이만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길 잃은 순간에는 누구나 아이가 된다. 어른도 숱하게 길을 잃는다. ‘삶’이라는 길, 끝끝내 우리가 다 알지 못할 길을 헤매야 한다.
이 시가 실린 시집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는 유고 시집이다. 시인의 말 중 인상적인 대목이 있어 여러번 읽었다. “나는 사랑했고 기꺼이 죽음으로/ 밤물결들이 써내려갈 이야기를 남겼다.” 밤물결들이 써내려갈 이야기라니 얼마나 차갑고 캄캄하며 뒤척일 이야기일까.
박연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