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재건 첫걸음은 정체성 정립
美 보수 닉슨 사태 극복 교훈 삼아
尹 탄핵 반대 당론 무효로 하고
극단적 음모론 세력과 거리 두길
1974년 여름 미국 공화당 소속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코너에 몰려 있었다. 그해 8월5일 닉슨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가 공개되면서 그가 민주당 전국위원회 도청(‘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됐고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수사를 방해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다음 날 보수의 스피커였던 ‘내셔널 리뷰’에는 닉슨의 사임을 공식 촉구하는 ‘편집자 사설’이 실렸다. 이 잡지의 창간자인 윌리엄 버클리는 닉슨의 도덕적·정치적 정당성이 회복 불가능한 정도로 무너졌다고 판단했다. 그다음 날 저녁 공화당 상원의원 몇몇이 백악관으로 닉슨을 찾아갔다. 그들은 닉슨에게 하원의 탄핵소추와 상원의 탄핵 인용 가능성이 높은 분위기라고 전했다. 닉슨은 그다음 날 저녁 TV연설을 통해 사임을 공식 발표했고 그다음 날 하야했다. 미국 보수는 닉슨을 ‘보수주의의 이단아’로 규정하고 닉슨 하야 사태를 보수 정체성 재정립의 계기로 삼았다.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 당시 필자는 이 칼럼에서 비상계엄 사태로 위기에 처한 한국 보수를 향해 미국 보수의 부활사(史)에서 교훈을 얻을 것을 권고하면서 닉슨의 사례를 소개했다. 국민의힘이 시대착오적이고 반(反)헌법적인 비상계엄 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헌정 질서를 파괴하려 했던 윤석열 전 대통령과는 절연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국민의힘이 그런 방향으로 움직였다고 해도 비상계엄 심판 성격이 강했던 6·3 조기 대선에서 승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보수가 ‘부정선거론’에 경도된 시대착오적인 세력과 다른 기치를 내걸고 선거에 임했다면 비상계엄과 탄핵의 강을 건너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발판은 마련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탄핵 반대 세력이 밀어올린 대선후보가 파면당한 대통령의 응원 속에 캠페인을 펼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선거에선 잘 지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면 패배한 후보를 찍은 유권자들도 아쉬움 속에서 분발심을 키운다. 그 반대이면 지지자들조차 허탈감 속에서 길을 잃게 된다.

닉슨의 불법 도청과 거짓말, 사법 방해는 ‘법과 질서(Law and Order)’를 중시해온 미국 보수에 씻기 힘든 오명을 안겼다. 닉슨 사태로 보수는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그 폐허 속에서 보수는 1980년 레이건 시대를 개막시키면서 부활했다. 와신상담의 재건 노력이 이뤄낸 성과였다. 미국 보수가 재건 과정에서 청산 목록에 올린 건 닉슨만이 아니었다. 극단 세력과도 거리를 뒀다. ‘존 버치 협회’가 대표적이다. 이 협회가 표방한 반(反)공산주의와 ‘작은 정부’ 기치, 전국적 네트워크로 연결된 회원, 열성적 후원. 보수 재건의 연료가 될 수 있었지만, 보수 지도자들은 이들을 배제하기로 결단했다. 이 협회는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마저 모스크바에 포섭된 공산주의자라는 극단적인 음모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과 손을 잡는 순간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다수의 지지를 잃을 수 있다고 봤다. 현명한 결정이었다. 극단을 들어낸 공간으로 중도·온건이 흘러들어와 보수의 저수량이 크게 늘었다.
비상계엄과 탄핵 사태로 한국 보수도 치명적 내상을 입었다. 길 잃은 한국 보수의 재건도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 우선이다. 그러려면 윤 전 대통령 사안부터 정리해야 한다. 국민의힘 김용태 비상대책위원장이 개혁안으로 제시한 ‘탄핵 반대 당론 무효화’는 보수 재건 과정에서 어떤 세력과 함께하고 어떤 인물은 배제할 것이냐는 문제와 직결돼 있다. 탄핵 반대 당론은 국회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직전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 결정된 것이다. 국민의힘 원외 당협위원장과 당원의 의사는 배제된 반쪽짜리 당론이다. 무엇보다 헌법재판소가 전원일치로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을 내리면서 탄핵 반대는 명분을 잃게 됐다. 법치를 존중해야 할 보수 정당이 탄핵 반대 당론 하나를 바로잡지 못한 채 집안싸움만 하고 있으니 한심하다. 비상계엄 선포 배경이 됐던 ‘부정선거론’은 아스팔트 극우가 내건 주요 기치 중 하나였다. 윤 전 대통령과 그 추종세력은 여전히 이 음모론을 맹신하고 있다. 고름이 살 안 된다. 이들과는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 고름을 짜내고 감염 부위를 도려내면 새 살이 차오른다.
조남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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