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 일본인과 용산 전쟁기념관 1층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9-10

북한의 6·25 기습 남침 하루 만인 1950년 6월26일 우리 공군 조종사 10명이 급히 한국을 떠나 일본 이타즈케의 주일 미 공군 기지로 갔다. 당시 공군은 연락기, 훈련기만 있고 전투기가 한 대도 없었다. 일본에서 ‘벼락치기’로 전투기 조종술을 익힌 한국 조종사들은 고작 1주일 뒤 미군에서 넘겨받은 F-51 머스탱 전투기 10대를 몰고 돌아와 곧 실전에 투입됐다. 일본에 체류하며 연습한 기간이 워낙 짧았던 터라 희생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종사 10명 중 이근석 대령(훗날 준장 추서)이 가장 먼저 전사했다. 그는 두 번째로 출격한 1950년 7월4일 경기 수원 상공에서 북한 지상군과 교전하던 중 대공포에 맞자 그대로 적 탱크로 돌진해 장렬히 산화했다. 당시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어렵게 얻은 그 비행기(F-51)를 겨우 이틀 타고 전사한 것이 원통하다”라는 말로 고인의 넋을 기렸다.

1950년 9월15일 새벽 역사적 상륙작전을 위해 인천 앞바다에 출현한 그 거대한 함대는 어디에서 왔을까. 미 육군 7사단을 태운 1진은 일본 요코하마, 미 해병 1사단을 실은 2진은 고베, 함포 사격을 할 해군 함정 위주의 3진은 사세보에서 각각 닻을 올렸다. 일본이라는 후방 병참 기지가 없었다면 6·25 전쟁 초반 미군 등 유엔군이 어떻게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을지 아찔할 따름이다. 3년 넘는 전란 기간 수많은 일본계 미국인이 미군 소속으로 한반도에서 싸웠고, 그중 일부는 하나뿐인 목숨을 바쳤다. 히로시 미야무라(2022년 별세) 육군 하사처럼 뛰어난 전공으로 미국 정부에서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한국 정부로부터는 태극무공훈장을 각각 받은 영웅도 여럿 존재한다. 오늘날 한반도에 또 비상 사태가 발생하는 경우 미군이 한국에 보낼 증원군의 중간 집결지는 일본 오키나와에 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전시 공간은 대략 1950년을 기점으로 둘로 나뉜다. 선사 시대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무렵까지의 전쟁사는 1층에서 간접 체험이 가능하다. 6·25 전쟁 기간 및 그 이후와 현대 한국군의 활약상은 2·3층에서 엿볼 수 있다. 그중 3층은 전란 당시 한국을 도운 유엔 참전 22개국에 고마움을 표하는 전시물과 조형물로 가득하다. 일본은 유엔 참전국이 아닌 만큼 3층에서 일본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다. 반면 1층은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부터 구한말 의병 전쟁, 그리고 일제강점기(1910∼1945) 독립 투쟁까지 일본에 관한 기록이 즐비하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양국 간 과거사를 떠올리게 된다. 19세기 일본 등 강대국 군대가 쓴 일명 ‘개틀링 기관총’이 특히 그렇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선 정부의 부탁으로 농민군 진압에 개입한 일본군이 구식 화승총과 죽창 등으로 어설프게 무장한 우리 농민들에게 난사해 무수한 희생자를 낳은 바로 그 무기 아닌가.

‘2025 서울안보대화’ 참석 및 안규백 국방부 장관과의 양자 회담 등을 위해 방한한 나카타니 겐(中谷元) 일본 방위상이 9일 전쟁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나타카니 방위상은 기념관 2층의 6·25 전쟁 전시실을 주로 살펴본 뒤 돌아간 것으로 전해졌다. 임진왜란이야 그렇다 쳐도 한국인들이 일본에 맞서 싸운 의병 전쟁과 독립 투쟁의 역사를 고이 간직한 1층 전시실 관람은 솔직히 부담스러운 행보일 것이다. 두 나라가 경제·문화 분야 협력을 통해 밝은 미래로 나아가야 함은 당연하다. 아울러 어두운 과거사를 직시하고 그릇된 언행은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노력도 꼭 필요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전쟁기념관을 찾는 일본인들이 2층은 물론 1층과 3층 전시실에도 관심을 갖길 고대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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