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이름의 회전목마

2024-11-21

잠이 잘 들지 않는 밤에는, 빗소리나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잠을 청한다. 재클린 듀프레이의 첼로 연주들,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 나오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솔리튜드(Solitude)’와 함께 자주 듣는 음악은 히사이시 조가 작곡한 ‘인생의 회전목마(人生のメリ-ゴ-ランド)’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메인 테마곡. 왈츠풍의 ‘인생의 회전목마’는 차분한 피아노 연주로 시작하여 활기찬 어린 시절에서 청년을 거쳐 절정에 이르렀다가 천천히 정리되었다가 다시 이어지는, 인생을 회전목마에 비유한 곡이다.

어린 시절, 어린이대공원이나 에버랜드에 가면 회전목마를 탔다. 말 위에 앉아서 빙글빙글 돌아가면 나를 찾는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다시 돌아가면 또 만날 수 있었다. 조금씩 변하지만 회전목마에서 보는 풍경은 돌 때마다 같은 곳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더 이상 회전목마는 타지 않게 됐다. 빠르고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롤러코스터나 허공을 붕붕 가르며 돌진하는 바이킹 같은 놀이기구들에 반했다. 같은 곳을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아무리 빠르게 순간을 지나쳐가도, 내가 돌아오는 자리는 언제나 같다는 것을.

한동안 회전목마를 잊었다가, 대학 시절 만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다시 만났다. 현실을 회피하며 냉소적이었던 하루키의 초기 소설집 제목이 <회전목마의 데드히트>였다. ‘그것은 회전목마와 비슷하다. 그것은 정해진 장소를 정해진 속도로 돌고 있을 뿐이다. 아무 데도 갈 수 없고, 내릴 수도 갈아탈 수도 없다. 누구를 따라잡을 수도 없고, 누구에게 따라잡히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그런 회전목마 위에서 가상의 적을 향해 치열한 데드히트를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루키가 말하는 ‘인생은 회전목마’에 꽤 동조하던 젊은 시절이었다.

전후(戰後) 세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우울과 불안에 사로잡힌 초기 소설과는 다르게 전전(戰前)에 태어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일관되게 자신의 역할을 찾아 어쨌든 살아남으라고 말한다. 같은 회전목마지만, 같은 곳을 언제나 맴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야자키의 회전목마에서는 돌 때마다 다른 풍경이 보인다. 인생이라는 회전목마는 치열하게 가상의 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꾸준하게 자신과 마주 서며 희망을 찾아가는 다정한 무대이기도 하다.

요즘 세상을 보면서, 모든 것이 반복이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인간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인간성의 의미를 확장하며 자유와 평등, 박애 등의 가치를 굳건하게 만들어왔다. 어떤 시대나 지역, 국가에서 모든 의미와 가치가 후퇴하는 때도 있었지만 결국은 나선형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하층의 인간을 마음대로 죽이거나 부릴 수 있었던 중세보다 현대는 분명 진보했다. 다음 시대 역시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당장 내일이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최근에 본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서정적인 영화 <룸 넥스트 도어>에서 인간의 미래에 희망은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말한다. 기후위기는 이미 자명한 과학적 사실이고, 세상이 점점 안 좋아지는 사회적 요인은 신자유주의와 극우의 득세라고. 지금은 둘 다 범람하고 있으니 더 이상 희망은 없다고. 그 말에 동의한다. 빈부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늘리고, 혐오와 증오를 기반으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세상에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룸 넥스트 도어>의 잉그리드는 말한다. 그래도 젊은이들에게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고. 인류의 미래에 희망이 없더라도, 개인의 삶에는 행복과 희망이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끝장나는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버리는 파국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종군기자였던 마사는 인간이 만든 최악의 현장을 보면서, 매일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기쁨과 즐거움을 갈구했다. 암과 싸운다는 표현을 거부하며,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했다. 아무리 희망이 없더라도, 지금의 행복을 추구할 희망은 존재한다. 잉그리드가 ‘건너편 방’에 함께 있어 준다면 차분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마사의 행복한 마지막처럼. 공허한 ‘회전목마 위의 데드히트’가 아니라 빙글빙글 돌아가며 익숙한 풍경을 보여주는 회전목마처럼 화사한 찰나를, 우리는 즐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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