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신과 창조의 아이콘처럼 인식되는 미국 정보기술(IT) 기업 애플은 1997년만 하더라도 주가가 1달러 미만이던 파산 직전 기업이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의 디자인 혁신으로 2020년에는 시가 총액이 2조 달러를 넘어 21세기 최고의 혁신기업이 됐다. 디자인의 힘이 그만큼 강력하다. 디자인은 기술에 인간의 잠재적 욕구에 기반을 둔 기능·스토리·의미·감성·경험 등의 가치를 부여하고 사물에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불어넣는다. 현대에 디자인은 기능이 확장돼 도시 혁신과 사회문제 해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디자인은 국가 경쟁력의 원천
영국·덴마크, 전략적으로 육성
‘국가 디자인 위원회’ 신설해야

이미 세계 각국은 디자인을 국가 혁신의 핵심으로 인식하고 범정부 차원의 정책을 펴고 있다. 영국은 예술·디자인 진흥을 위해 ‘국가예술인문연구위원회(AHRC)’를 설치하고, 사회적 이익(삶의 질 향상과 공동체 강화), 경제적 이익(제품 혁신, 서비스 강화, 효율성 향상)을 위한 종합적인 ‘영국 디자인 액션플랜’을 2018년부터 추진 중이다. 덴마크는 ‘디자인 비전 위원회’(2020)를 설치하고 덴마크 디자인을 세계화하기 위한 국가브랜드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초·중·고는 물론 공대와 경영대에서 창의성 함양을 위해 디자인을 필수 교과로 지정했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대기업들은 디자인 혁명을 통해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했다. 문제는 대기업이 보여준 성과에 비해 국가 차원의 디자인 산업은 여전히 열악한 수준이라는 점이다. 2024년 디자인산업통계조사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30만 명의 디자이너가 활동하지만, 중소기업의 디자인 활용률은 37.3%에 그칠 정도로 매우 저조하다. 디자인 전문기업은 약 2만 개나 되지만 대부분 종사자 수 5인 이하의 소규모이고, 평균 매출액도 3억원 선의 영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존 마에다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RISD) 전 총장은 “디자인에서 21세기의 창의 경제와 국가 경쟁력이 나온다”고 역설했다. 최근 화두가 되는 인공지능(AI)과 로보틱스 등 첨단 기술은 더 고도화한 디자인의 역할이 필요하다. 디자인은 단지 제품 외관이 아니라 인간 삶과 경험, 나아가 사회·문화·경제 영역을 폭넓게 아우르기 때문이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한국은 미래 창조 산업의 핵심인 디자인 정책과 육성이 시급하다. 특히 국가 차원에서 새로운 시대를 이끌 ‘디자인 혁신 전략(Initiative Korea By Design)’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디자인 중심의 국가 경영을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정책이 필요하다.
첫째, 디자인을 산업·사회·국가의 미래 창조를 위한 핵심 동력으로 인식하고 국가 경영철학을 수립해야 한다. 제조업 중심의 기존 디자인 활동에서 벗어나 서비스·사회·국토·농수산·해양·문화·관광 등 모든 산업과 사회 시스템 전반으로 디자인 적용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
둘째, 미래 가치를 선도할 디자인 연구개발(R&D)에 국가 차원의 투자를 확대하고 이를 통해 21세기형 신산업 및 신기업 창출을 견인하는 디자인 선도형 창업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창의적인 스타트업이 디자인을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제도적·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
셋째, 국민의 창의성 함양을 위해 초·중·고와 대학 교육과정에 디자인 사고 중심의 교육을 강화하고, 일반 시민 대상의 디자인 리터러시(문해력) 교육 프로그램도 함께 확대해야 한다.
넷째, 미래지향적 디자인 창조 인프라 구축을 위해 디자인 기업, 교육기관, 연구소, 전시장, 마켓 등이 융합된 ‘디자인 혁신 밸리’ 조성이 필요하다. 이는 창의 생태계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지속가능한 혁신 허브로 기능하게 된다.
다섯째, 디자인 정책은 부처 간에 유기적·통합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 산하에 ‘국가 디자인 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이를 통해 디자인 중심의 국가 전략이 일관되게 추진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1987년 정부 관료들에게 “디자인할 것인가? 쇠망할 것인가?”(Design or Decline, 1987)라며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금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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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종 전 한국디자인단체총연합회 회장·서울대 디자인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