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이 곧 표가 되던 시절, 1988년. 초선 의원 노무현이 5공 청문회에 나온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남겼던 일갈은 지금도 회자한다. “시류에 따라 산다”며 전두환 정권의 정치자금 요구에 응했다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남긴 정주영 회장에게 노무현 의원이 ‘힘 있는 사람의 요구라면 부정한 것이라도 따라갈 텐가?’라며 따져 물었던 장면은 정경유착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한국 정치를 바꾼 도화선이었다.
통일교가 정치권에 여야를 막론하고 돈을 뿌렸다는 스캔들이 일파만파다. 윤석열 정권 탄생에 통일교의 검은손이 작동했다는 의혹이 이제 통일교 게이트로 비화할 조짐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공식 석상에서 두 차례나 ‘정치 개입하고 불법 자금으로 이상한 짓을 하는 종교단체 해산’ 문제를 언급했다. 통일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3개 특검의 수사 면면마다 온갖 종교의 이름과 종교인으로 분류되는 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교를 인정하지 않으며,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규정한다. 하지만 이 글귀가 휴지 조각이 돼버린 지 오래란 것은 누구나 안다. 이미 종교와 정치는 한 몸이다. 정확히 말하면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가진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의 탈을 쓴 크고 작은 종교재벌이 그렇다. 이들은 간판에 종교를 걸어놓고 동네마다 뿌리내린 신흥재벌이다. 수익에 세금을 안 매긴다는 것 외엔 재벌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돈을 모으고 세를 갖춰 권력에 줄을 대는 모양새도 비슷하다. 돈과 권력이 모이는 자리에 더 많은 신도가 모이고, 그것이 더 큰 힘을 약속해줄 것이란 오랜 교리를 이들은 잘 안다.
정치는 여전히 종교재벌들의 눈칫밥을 먹고산다.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다. 표 있는 사람의 요구라면 부정한 것이라도 따라갈 텐가?
정치인들에게도 종교재벌은 좋은 파트너다. 돈과 표가 필요한 정치인에게 지역구 한복판에 거대한 성전을 세워놓고 주말마다 신도들을 모아 세를 과시하는 사람만큼 매력적인 유권자도 없을 것이다.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동네마다 자리 잡은 종교재벌들을 무시하고서는 선거를 치르기 어렵다. 앞에선 정교분리와 극우 개신교를 비판해도 선거철마다 종교시설에 가서 이런저런 약속을 바치며 종교재벌들에 고개를 조아리고 기도를 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한 표가 아쉬운 정치인들의 숙명이다.
종교재벌들은 이제 정치의 전면으로 돌진하고 있다. 종교인이 체면치레로라도 정치와 선을 그어두던 예전과 또 다른 양상이다. 정치 현안에 스스럼없이 목소리를 내며 연단에 서서 시민을 선동하는 모습은 종교지도자인지, 정치지도자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들은 길거리가 신자들을 확보할 얼마 남지 않은 장소라는 걸 잘 안다. 앞으로 종교재벌들이 길거리에서 장사하며 나라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일은 더 잦아질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여전히 종교재벌들의 눈칫밥을 먹고산다. 특검 수사를 비웃으며 수사망을 빠져나간 재벌 목사들을 비호하며 특검에 옐로카드를 줬던 건 다름 아닌 여당 의원이었다. 범법행위를 반복하는 종교재단 해산을 검토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지시는 손색없이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이 복마전을 부술 수가 없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다. 표 있는 사람의 요구라면 부정한 것이라도 따라갈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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