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전태일은 학력이 짧았고 삶도 짧았다. 그럼에도 전태일이 남긴 글은 많았다. 어린 시절 회상 수기, 일기, 편지, 호소문, 소설, 모범업체 설립계획서, 설문지, 진정서, 유서 등 다양한 글이 있다.
표현력이 우수했고 특히 유서에서 고민한 철학적 깊이와 폭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라 해도 반박할 수 없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에 취직했던 1965년 8월 말부터 죽음을 결단한 1969년 말까지 시와 소설 등 많은 문학작품을 읽고 그 영향을 받아 글쓰기를 했다.
1967년쯤이다. 전태일 나이 만 19세, 뜨거운 청춘이었다. 전태일은 자신이 다니던 봉제업체 업주의 처제를 어떤 기회에 만나자마자 사랑의 포로가 돼 열병을 앓았다. 4살 연상이며 잘 사는 집안 여성이었다.
지독히 가난했던 전태일은 나이와 가정환경 차이로 이룰 수 없는 사랑이란 걸 알았기에 애타는 마음의 글을 일기와 수기에 남겼다. 속앓이를 해야만 했던 짝사랑을 일기와 수기에 묘사한 글은 19살 밑바닥 노동자가 쓴 글로는 믿기지 않게 간결하고 심리묘사가 뛰어났다.
또한 아래와 같은 시로써 실연의 슬픔을 달랬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서
지금 이때 누나는 나를 생각할까? 누나.
백지에 그어지는 선, 누나를 내 마음에 긋는 선,
샛별이 졸 때면 누나도 졸겠지. 나는 울어야 하지.
삼각지에 갈 때는 빨간 장미를 달지
너는 흰 장미를.
물결치는 인파를 넘어 여기는 도봉산,
자랑이나 하듯이 높이 버티고 있는 너 정말 엄숙하구나.
무작정 오르며 너의 참 뜻을 알게 되고
무작정 걸으면 너의 속삭임을 알게 되고
바쁘게 내리면 너를 잊어버리고 만, 나.
국화꽃 피는 가을,
찬 서리에 겨울을 알고
황금빛으로 퇴색하는 잔디 밟으며 겨울을 알고
그렇지만 지금은 서리 내리는 가을,
못 잊을 옛 추억도 퇴색 하는구나.
겨울과 가을사이에… 極,極,昌,壹,極
냉혹한 현실이란 어깨의 짐은 무겁고 그 어깨의 힘은 모자랐던 전태일에게는 남들이 다 해보는 연예라는 것도 이루지 못할 환상이었을까? 다음 글을 남겼다.
“내 스스로 절제할 수 없는 감정의 포로가 되기 이전에 한참 피어나던 사랑을 찍어버린 것이다. 마음에 내린 뿌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줄기 없이 뿌리가 얼마나 더 존재하겠는가? 곧 퇴화하고 말겠지. 부디 동심을 버리고 현실에 충실하라.”
단호한 결심을 한 뒤에도 미련이 남았다. 평화시장에서 위험분자란 이유로 해고당해 혼자 청계천 평화시장 가까이 있는 당시 동숭동 서울대 법대 뒤 낙산동에 시집을 들고 가서 외로움을 마치 취미처럼 즐겼다.
당시 일기와 수기에는 유행가 가사와 많은 시들을 적어 놓았다. 김소월과 외국의 유명시인들의 책을 가까이 한 것 같다. 수기에는 다음 시인들의 이름이 나온다. 김소월, 로세티, 예츠(예이츠), 번스 등등.
김소월(1902〜1934)은 설명이 필요 없는 우리 모두가 아는, 한국을 대표하는 서정시인이다. 시 『못 잊어』, 『밤』, 『초혼』, 『산유화』, 『옛 이야기』, 『진달래꽃』 등을 노트에 적어 놓았다.
로세티(Christina Rossetti; 1830〜1894)는 영국의 대표적인 여성 시인으로 전태일은 수기에 『내가 죽으면 사랑하는 이여』란 작품을 적어 놓았다.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95〜1939)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가톨릭과 개신교 풍의 시의 세계를 넘나들며 영적인 시를 써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수기에는 『패니에게』란 작품을 적어 놓았다.
번스(Robert Burns; 1759-96)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사랑을 노래하며 농촌 서민의 생활을 소박한 감정으로 표현했다. 수기에는 『내 사랑은 빨간, 빨간 장미꽃』을 적어 놓았다.
외국의 시인, 세 사람의 시는 서정적이며 아름답고 애틋하며 신비감으로 전태일을 듬뿍 젖어들게 했다. 이 시들의 공통점은 다분히 기독교적인 종교적 색채와 서정적인 신비함이 엿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아울러 그들은 죽음과 이별과 사랑을 노래했다. 이 시들을 통해서 전태일은 자신의 사랑과 신앙과 삶을 비춰보려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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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수기에서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언급한다. 전태일이 말년에 쓴 주옥같은 자필 수기들의 문체는 괴테의 소설 속에서 나오는 `베르테르‘가 구사한 구어체의 필체와 형식이 비슷했다.
이 소설은 전태일이 행동하는 문학청년이 되는 최초의 발단과 원동력이 되었다. 전태일은 괴테의 소설 속 인물, 베르테르의 영향을 받았다. 전태일은 자신을 소설의 주인공 베르테르로, 짝사랑 한 여인을 소설의 여주인공 샤를 롯데로 동일시했다. 전태일은 어느 순간 꿈에서 확 깨어나며 이런 글을 남겼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어느 날, 나는 깊은 죄의식을 깨달았다. 지금 이 시간 집에서는 이 불효한 자식을 위해서 정성을 드리고 계실 어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지금 이런 사치에 한 눈을 팔 때가 아니다.”
전태일은 자신이 부양해야 할 가족도 마음에 걸렸겠지만, 동시에 어린 여성 노동자를 짐승처럼 부리며 인간의 고귀한 존엄을 모욕하는 고용주들의 노동착취도 떠올렸을 것이다.
1969년 11월쯤에 쓴 일기에는 다음 글이 있다.
아름다운 것을 보았느냐고요? 네, 보았습니다.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았습니다. 모파상의 『비계 덩어리』 중에서 프러시아 군대 병사가 자기들의 점령지역 안에 혼자 사는 노파의 밀린 빨래를 빨아준다는, 그 아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아름다움을 음미했습니다.
저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아신 일이 있으면 저에게도 나누어주십시오. 저의 메마른 심령 위에 향기로운 기름을 부어주십시오. 그리고 속세에서 심한 생존경쟁의 싸움터에서 휴식을 갈구하는 미약한 저에게 동심의 감화로 눈물을 일으켜주십시오.
저는 너무나 메말랐습니다. 너무나 외롭습니다. 저에게는 휘황찬란한 물질문명의 베일보다는 외딴 초가집의 그을음 등잔 밑에서 노 할아버지의 고담이 더욱 좋습니다. 밤이 되면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불야성을 이루고 자동차의 행렬이 불꽃성을 이루는 도시의 소음보다는 귀뚜라미 소리 단조로운 사랑방에 동네방네 친구들과 사랑의 토론이 얼마나 멋있을까요.
친구여, 나는 그토록 많은 시간을, 그토록 허무하게 보냈습니다.
전태일 일기 원문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비개덩이』라고 했는데 착오였다. 몇몇 맞춤법 틀린 단어를 수정했다.
『비계 덩어리』는 프랑스의 문호 모파상의 첫 작품으로 단편이라기에는 길고 중편이라기에는 짧다. 이 작품은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한다.
『비계 덩어리』의 시대 배경은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보불전쟁(1870〜1871)’에서 프랑스가 참패해 프랑스 땅에 프로이센 군대가 점령했을 때다.
이 글에서 살펴 알 수 있는 점은 전태일은 학력에 비해 독서수준과 폭이 매우 높고 넓었다는 것이다. 또한 글쓰기 수준도 마찬가지였다. 천부적인 문학청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전태일은 살아생전에 소설가가 되는 꿈을 지녔다고 한다. 실제 미완성 소설 초안을 쓰기도 했다.
일기에 나오는 “프러시아 군대 병사가 자기들의 점령지역 안에 혼자 사는 노파의 밀린 빨래를 빨아준다”는 글은 스쳐지나가는 한 줄 문장으로 인용할 가치가 있거나 특별한 내용이 아니다. 눈여겨 볼 내용이 아니고 단순한 서술이다.
그런데 전태일은 이 글귀에서 연민을 떠올리며 감정에 동조가 일어났다. 이 문장을 끄집어내 감명 깊게 읽고 일기에 이렇게 언급한 걸 보면 전태일은 요약본같은 것에서 인용하지 않았고 『비계 덩어리』를 자세히 읽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점령군 한 병사가 점령지 집들을 점검하면서 몸이 불편해 빨래가 밀린 측은한 노파를 발견한다. 점령군 병사가 노인의 빨래를 빨아주는 묘사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감정을 느꼈다.
『비계 덩어리』는 1880년에 발표돼 지금까지 중편소설로 최고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동안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이 읽었겠지만 전태일과 같은 연민의 감정을 느낀 사람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합니다”는 전태일 특유의 숭고한 연민을 전태일의 『비계 덩어리』란 책 감상문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언제 어디에서나 솟아나는 연민이 전태일의 삶을 지배한 정신세계와 문학세계가 아니었을까?
전태일의 타고난 마음씨 가운데 우리가 정말 본받아야 할 품성은 바로 이런 ‘연민’이다. 이 연민이야말로 전태일 정신과 삶의 시작과 끝(알파요 오메가)이다.
연민은 한국의 전통 유가사상 핵심의 하나인 ‘측은지심’이다. 맹자는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싹(惻隱之心 仁之端也)이라고 말했다. 유교의 인은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와 한 치도 다르지 않으며 고등 철학과 종교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숭고한 궁극의 덕목이다.
전태일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빠져 있던 때인 1969년 11월은 분신하기 1년 전이다. 베르테르가 쓴 마지막 편지에 나오는 이 구절이 전태일의 분신에 영향을 주었을까?
“아아,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피를 흘리고, 그 죽음으로써 친구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생명의 불길이 타오르게 한다는 것은 극소수의 숭고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전태일은 1969년 12월 31일 생애 마지막 연말을 넘기면서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운명의 1970년을 맞이할 각오를 이렇게 다짐한다.
“올해와 같은 내년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나는 결코 투쟁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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