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 태극기와 성조기가 꽂혔다. 빨간 옷을 입은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확성기가 울려 퍼졌다. 대열에서 가장 앞장선 이는 “집값 떨어뜨리러 왔다”며 “그래야 판사가 정신 차린다”고 외쳤다.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을 심리하는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자택을 찾아온 한 보수단체다.
이른 아침 한 고등학생은 소음에 잠이 깼다고 했다. 평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집에서 공포를 느낀 건 처음이었다. 어린이집 차량으로 향한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기 바빴다. 철없는 아이들은 “부정선거 사형”이라는 구호를 따라하며 킥킥됐다. “야동판사”, “음란물” 등 낯 뜨거운 단어들이 오가자 한 50대 여성이 항의했지만 “좌빨은 물러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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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의 부당성을 알리는 이들의 목소리는 국민이 아니라 문형배 권한대행을 향하고 있었다. 디시인사이드 등 온라인커뮤니티에서도 문 대행의 아파트에 ‘좌표’가 찍혔다. 문 대행의 집 위치가 담긴 선동글과 함께 실제 다녀왔다는 인증 글이 잇따랐다. 문 대행이 고교 동창카페에 올라온 음란물에 댓글을 달았다는 의혹은 합성 사진에서 시작된 사실이 확인됐지만 이들은 ‘문 대행이 과거 미성년자 음란물을 즐겼다’거나 ‘성매매 업소에 다녀왔다’는 등 실체 없는 이야기를 버무려 음란물 판사를 대명사처럼 사용했다.
한 게시자는 “문형배만 패는 게 제일 효과 있었다”며 “행번방(문형배+N번방), 마은혁 (헌법재판관) 임명 무력화, 변론기일 추가 등 전부 우리가 해낸 것”이라고 자축했다.
지난해 말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오른 한 논문에 따르면 소셜미디어에서 분노를 유발하는 가짜뉴스는 보통 게시물보다 더 빨리 확산했다. 2014년 다른 사이언스 논문에서는 부도덕한 사건을 TV, 신문으로 볼 때보다 온라인상에서 접할 때 더 크게 분노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문 대행을 향한 의혹들 역시 출처는 대부분 익명 온라인 커뮤니티와 유튜브였다. 검열과 규제가 없는 공간에서 누군가가 조회 수와 후원금 등을 위해 무분별하게 가짜뉴스를 퍼 날랐다. 정치인들은 이를 검증절차를 거치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유했다.
이렇게 생성된 분노는 사법부로 향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모양새가 됐다. 윤 대통령이 지난달 15일 서울 한남동 공관에서 체포된 이후 지지자들은 ‘판사’에 좌표를 찍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판결하지 않으면 어떤 폭력도 가할 수 있다’는 위협을 가했다.
지금이라도 이성을 찾을 때다.
탄핵을 둘러싼 엄중한 결정을 앞두고 ‘헌재에 중국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거나 ‘선거에 관여하고 있다’는 등 누군가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미디어를 타고 진실처럼 포장되는 시기다. 단순히 타인의 주장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파편화된 진실 속에서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 집회는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고 설득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안승진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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