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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타이탄의 세이렌>의 원제는 으로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Jr.)의 1959년 작품이다. ‘Kurt’라는 이름에서 보듯 작가는 독일계 미국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군으로 참전해 독일군의 포로가 됐고, 미국 내 반전(反戰)주의자였으며, 이러한 그의 경험과 사상은 <제5도살장>을 탄생시켰다.
만 30세인 1952년 로 데뷔해 1997년 를 마지막으로 작품활동을 끝냈다. 그가 생전 출간한 소설은 총 14권이고 국내에는 10권만 소개됐으며 수상이라고는 단 한 작품도 하지 않았지만, 정신세계가 안드로메다쯤 있을 것 같은 모든 문장에는 숨 가쁘도록 빠져들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래서 뭘? 그런데 왜? 그리고 어떻게 됐나?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이어가게 하면서 결국 책장의 마지막 마침점을 보게 만든다. <타이탄의 세이렌>은 허무하면서도 발가벗겨진 기분마저 들게 한다. 딱히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으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다.
커트 보니것의 소설 가운데 국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번역된 책은 <고양이 요람>과 <제5도살장>이다. 그래봤자 서너 번이다. 그는 골초로 알려져 있는데,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한 때를 제외하곤 무척 건강한 체질이었다. 그러다 2007년 만 84세가 되던 해 낙상(落傷)으로 사망했다. 그때부터 작가의 국내 판권은 문학동네가 가진 것으로 보인다. 2022년 작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제5도살장>의 그래픽노블 판이 출간됐다. 커트 보니것의 이 위대한 역작을 (비록 어떤 상도 받지 못했지만) 다음 ‘책썰’에 소개할까 한다.
은 1972년 일본에서 <타이탄의 요녀(妖女)>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국내에도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그리스 신화의 님프 캐릭터 ‘세이렌’을 굳이 ‘요녀’라고 해석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책을 읽고 번역한 자가 요녀라고 갖다 붙이다니, 작가의 오리무중 정신세계를 이상한 방식으로 ‘따라쟁이’ 한 게 아닌가 싶다.
국내에 처음 출간됐을 때 제목은 <저 위의 누군가가 날 좋아하나 봐> (노종혁 역, 새와물고기)였다. 작가의 페르소나일지도 모를 극 중 윈스턴 나일스 럼포드가 말한, 이 책의 정체성 그 자체를 그대로 갖다 붙였다. 스포일러다! 제목 때문에 책의 초반에 복선처럼 제시되고 후반을 향해가는 순간에 제공되는 서스펜스가 확 반감돼 버리고 만다. 2003년 금문서적의 <타이탄의 미녀> (이강희 역)는 도로 ‘요녀’로 퇴행한 제목이고, 2016년에서야 원제를 그대로 써서 <타이탄의 세이렌> (정영목 역, 문학동네)으로 나왔다.
책은 초반부터 과격하다. “영혼으로 통하는 쉰세 개 관문”이라는 구절에서 53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함으로써 미지의 영역, 즉 ‘테라 인코그니타(라틴어: Terra Incognita)’에 고생 좀 하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라고 능청스럽게 허풍을 친다. 이어서 “한때는 여기에 등잔 같은 눈이 있었고 저기에 예민한 귀가 있었으며 저기에는 의심 가득한 콧구멍이, 또 저기에는 육식동물의 두뇌가 있었다. 여기와 저기에 걸린 근육 다발이 이빨을 살점에 박아 넣었다. 콱.”이라고 쓴다. 번역가의 각색 본능이 최소화된 이 문장은 신랄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통쾌하다.
럼포드는 행운에 행운의 행운이 겹쳐 엄청난 갑부로 살다가 우주여행에서 사고를 당해 ‘크로노-신클래스틱 인펀디뷸럼’이라는 곳으로 떨어진다. 그의 행운에 행운의 행운은 그곳에서도 이어져 우주에 거대한 왕국을 설립한다. 럼포드가 지구에서 그냥 갑부였다면 크로노 블라블라에서는 부와 권력을 뛰어넘는 유일한 절대자 반열에 오른다.
그는 영화 <인터스텔라> (2014, 크리스토퍼 놀란)의 쿠퍼(매튜 맥커너히 분)처럼 모든 차원을 아우르고, 드라마 <도깨비>(2016, tvN)의 김신(공유 분)처럼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미래를 들여다볼 줄 안다. 그의 차원 이동은 <콘택트> (1997, 로버트 저메키스)에서 엘리(조디 포스터 분)가 아버지를 만나러 우주로 차원 이동하는 것처럼 낭만적이면서도, 마지막으로 정착한 행성은 <돈 룩 업> (2021, 아담 맥케이)에서 가진 자들만이 갈 수 있었던 어떤 행성의 생태계처럼 냉혹하기 짝이 없다.
럼포드가 차원 이동을 하면서 다른 차원에서 미리 본 미래를 부인인 콘스턴트에게 주기적으로 알려준다. 담 밖에서 그 존재의 현현(顯現)을 ‘듣기만’ 하는 군중은 럼포드에 대하여 “병적인 상상력이라는 마법의 영사기 때문에 포르노”적인 오르가슴을 느끼며 그를 신격화한다. “군중이 텅 빈 담벼락에 마법의 영사기를 비춘 것이다.”
럼포드 부인의 이름은 맬러카이 콘스턴트이다. 남편의 성을 따랐다가 도로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그들은 ‘결코’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같이 살다가, 지구와 크로노-신클래스틱 인펀디뷸럼으로 떨어져 살며 차원 이동으로만 만나다가, 여차저차 우여곡절 끝에 얻은 아들 ‘크로노’와 함께 우주선을 타고 기계 생명체인 (고장난) ‘샐로’만이 존재하는 ‘타이탄’ 행성에 착륙한다. 작가는 우주선 여행에 대해 “의자에 묶여 있을 필요도 없고, 머리에 어항을 쓰고 다닐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타이탄에서 그들은 모두 다른 곳에 산다. 부인은 남편을 경멸하고, 남편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879,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에서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가 술에 취해 길거리의 거지 리자베타에 ‘배설’한 뒤 스메르쟈코프를 낳았듯 비어트리스와의 ‘교미’ 후 스스로 예언했던 아들 ‘크로노’를 만난다. 친모는 아들의 이름을 ‘엉크’로 지었지만, 럼포드 자신의 예언이 크로노였기 때문에 엉크는 크로노가 되었다. 남편은 부인이 죽고 나서야 그녀를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아무것도 없는 행성에서 심심하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헌신을 선택한 뒤로 그에 대한 보상을 사랑이라고 갖다 붙인 걸지도. 그리고 아들은 ‘인간새’가 되어 새떼와 함께 훨훨 날아간다.
<타이탄의 세이렌>에는 신(神), 권력, 부(富), 예술, 역사, 정치, 사회, 과학, 그리고 남녀 문제까지 신랄한 ‘글발’로 정신 사나운, 그러면서도 일관성 있는 맥락을 이어간다. 예컨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살 수 없기에 모나리자를 좌약 광고에 이용해 모나리자 또는 레오나르도에게 치욕이라는 벌을 주고, 이는 아름다움(예술)을 짓밟아버리는 자유기업 체제 방식이라고 정리한다든가, “사방에서 독특한 양처럼 온순한 미소가 보였다. 그 미소에서 드러나는 양들은 조건만 맞으면 기꺼이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았다.”라며 인간 심연의 악함을 묘사하기도 한다.
자신의 행운에 행운의 행운이 “저 위의 누군가가 날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럼포드의 신(神)의 단어를 기계 인간 샐리의 고향인 트랄파마도어 행성 언어로 번역하면 영국의 스톤헨지는 “교체 부품을 최대한 빨리 배달하고 있습니다.”이고, 중국 만리장성은 “기다려주세요. 우린 당신을 잊지 않았습니다.”, 로마 네로 황제의 별장 도무스 아우레아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은 “눈 깜짝할 사이에 길을 떠나시게 될 겁니다.”,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연맹본부는 “언제든 출발할 수 있도록 짐을 챙기세요.”이다. 곱씹고 곱씹으면서 각국의 역사와 국풍(國風)을 고려하면 참으로 익살스럽고 풍자적이다. 커트 보니것의 단어와 문장과 맥락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2011, 열린책들)만큼이나 흥미롭고 즐겁다.
이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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