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내고 다니는 직장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7-14

오늘날 ‘캥거루족’은 성인이 되어도 부모나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을 뜻하는 용어로 통한다. 그런데 캥거루족이란 표현이 처음 등장한 1990년대 중반만 해도 그 의미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국제통화기금(IMF) 개입을 초래한 외환 위기 직전인 1997년 6월 한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캥거루족은 대학 입학 후 4년이 지났어도 일부러 졸업을 하지 않으면서 계속 캠퍼스 안에 머물려고 하는 20대 청년을 지칭하는 신조어였다. 해당 기사는 캥거루족에 대해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기본적인 용돈을 벌어 쓰되 최대한 졸업을 늦추고 졸업 뒤에도 오랫동안 학교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이란 정의를 내렸다.

1997년 말 한국을 강타한 IMF 외환 위기는 캥거루족을 더욱 늘리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이 IMF에서 구제 금융을 받기로 한 이듬해인 1998년 1월 ‘강거루군(群)’이란 제목의 연극이 서울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 올랐다. 주인공 이름 강거루는 딱 봐도 캥거루를 연상시킨다. 대학 졸업 후 4년이 지났으나 입사 시험에서 번번이 낙방한 강거루는 그나마 동기와 후배들이 아직 남아 있는 학교 주변을 맴돌며 술로 소일한다. ‘공포의 면접관’으로 상징되는 기성세대를 향해 “지금까지 뭘 그리 잘해왔느냐”고 일갈하지만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고도 성장기인 1980년대 학번들이 “4년제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취업은 식은 죽 먹기였다”고 회상할 때 강거루는 절망감만 느겼을 것이다.

세계에서 인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중국 젊은이들이 요즘 심각한 취업난을 겪고 있다. 조만간 1200만명 넘는 대학 졸업생이 노동 시장에 쏟아질 텐데, 그들이 선호하는 일자리는 수요에 한참 못 미칠 것이 뻔하다. 중국이 인공지능(AI) 분야에서 미국을 추월하며 엄청난 혁신을 이뤘다고는 하나 이것이 곧바로 경제 성장과 고용 증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AI와 무관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전공자들에겐 사실상 ‘남의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란 수단을 동원해 중국의 대미 수출을 통제하고 나서면서 중국의 채용 시장은 더더욱 비좁아졌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 KBS가 흥미로운 보도를 했다. 중국에서 가족과 지인으로부터 “대학을 졸업했는데도 왜 직장이 없느냐”는 눈총에 시달리던 구직자들을 위한 회사가 생겨났다는 소식이다. 말이 기업이지 열심히 일해서 급여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돈을 내고 다녀야 하는 희한한 곳이다. KBS는 이를 탐문한 뒤 “직원들이 모여 회의를 하거나 상사에게 업무 지시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취직한 것처럼 위장하는 걸 돕는 가짜 직장”이라고 지적했다. 취재 과정에서 “30위안(약 5800원)만 더 내면 사장이든 부장이든 직급도 택할 수 있다”는 발언까지 나왔다고 하니 그저 기가 찰 노릇이다. 적어도 한국에선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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