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달 기록 농사

2025-12-17

농부들과 함께 하는 채소 시장에 갔다가 ‘텃밭달력 농사일지’를 사 왔다. 밤 맛이 난다는 백봉 단호박이나 푸릇한 꼬투리 콩에 마음이 들뜬 탓이다. 날짜별 농부의 일에 대한 정보와 함께 농사일지를 적을 수 있는 다이어리이다. 상추·고추·토마토를 언제 어떻게 심고 관리하면 좋은지, 씨 뿌려 거두어 말리고 털어 보관해서 다음 해를 기약하기까지 일 년 열두 달 24절기의 일정은 물론, 그 계절 무얼 먹고 마시고 놀면 좋은지 들살이와 놀이까지 정보가 가득했다. 텃밭은커녕 실내에 허브 화분 하나 키우지 않으면서 농사일지라니 하면서도, 색이 진한 팥의 비밀이 거기 다 숨겨져 있기라도 하듯 덥석, 자연 관찰일지로 활용해도 좋다는 설명에 옳거니, 집어 오고 말았다.

못생긴 감나무 관찰일지 겸해

내년 농사일지 다이어리 구입

일지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것

새해엔 어떤 기록 남기게 될까

자연 관찰일지라. 집 옆 담벼락에 바짝 붙은 감나무 일지라도 써 볼까. 담장과 담장 사이 좁은 공간에 용케 잘도 살아남았다 싶을 만큼 볼품없이 생긴 감나무. 감이 많이 열리는 것도 아니어서 굳이 따 먹자 생각을 안 하는 감나무. 해 뜨기 직전에 까마귀가 오고, 까치·지빠귀·참새 순으로 다녀가는 감나무. 까마귀는 은밀하고 까치들은 시끄럽고 참새들은 겁이 많고 지빠귀는 하나가 왔다가 돌아가서 친구들을 끌고 오고. 감나무와 방문객 일지를 써봐도 좋겠다 싶었다.

그나저나 다이어리를 구입한 적이 언제였나. 어디서 사은품이나 기념품으로 들어오면 노트 대신으로 사용하긴 하지면 돈을 들여본 적은 거의 없다. 아무리 유용하게 만들어진 시스템 다이어리라도 두어 달쯤 지나면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한 메모장으로 전락한다는 걸 경험상 잘 알고 있으므로. 기록을 위해서라면 기기 간에 연동도 되는 캘린더와 메모 사진 앱이 훨씬 편리하고 유용하므로. 다이어리는 이미 구시대 유물로 전락한 지 오래지만, 일정을 잡으려면 일단 캘린더 앱부터 열고 보지만, 이상하게 탁상달력만큼은 큼지막한 것으로 마련해 두어야 마음이 놓인다.

보통 탁상 달력에는 총 열세 달이 인쇄되어 있다. 그해 열두 달과 함께 전해 12월. 새 달력의 출발은 지나갈 해의 마지막 달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그래서 새 달력을 받으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일과 새해를 가늠해 보는 일을 동시에 하게 된다. 지난해 달력을 살펴보면 부듯함보다는 아쉬움이 먼저 든다. 이런 것들을 하며 살았구나가 아니라 저런 것들을 하려 했구나, 이러저러한 것을 결국 못하게 되었구나. 아이쿠 편집자에겐 또 무슨 변명을 해야 하나. 올해 마무리하기로 한 장편소설은 언제 꺼내 볼 생각이었나. 하루 백 보 이하가 허다하면서 하루 칠천 보의 목표는 왜 세운 것이냐.

그렇게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 새 달력의 첫 장이며 올해 남은 마지막 달에 일정과 계획을 적어본다. 그러면 어쩐지 새해에 한 달의 덤이 생긴 것 같아 조금 여유로워진다. 제겐 아직 스무날이 남아 있습니다, 이 마지막 날들을 알차게 보내면 그다음 열두 달도 계획한 바와 같이 이루어지오리다, 자신감이 다시 차오르며 각오와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구입한 농사일지는 한 달의 덤 없이 열두 달로 구성되어 있었다. 12월에는 무슨 일을 하려나 미리 펼쳐보았다. 마음을 가다듬는 한 해의 끄트머리 매듭달, 기록 농사 갈무리 달이라 적혀 있다. 씨앗을 갈무리하듯 좋은 삶에 필요한 기록을 갈무리하라! 일지에 인쇄된 글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이러하다.

‘기록 농사는 한 인간에게나 공동체에서나 요구되는 기억, 정서, 자부심 관계, 문화를 재배하는 일이다. 기록농사를 통해 재배되는 기억으로 좋은 삶을 상화(相和)할 수 있고, 기록농사를 통해 재배되는 자부심으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신뢰를 더 가질 수 있다.’ (‘텃밭달력 농사일지’의 ‘꿈이 자라는 뜰’ 인용)

농부들이 완두콩은 언제 심고 언제 수확하나 정보 차원에서, 거기 맞춰 나도 한번 자연관찰일지 끄적여 볼까 하는 마음으로 가져온 농사일지였다. 허리가 곧추세워졌다. 기록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남기고 기억하는 일이 아니었다.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날씨를 살피고 보살피고 난 후에야 갈무리할 수 있는 농사처럼 재배해야 하는 것이다. 한 페이지가 늘었다고 한 달의 여유가 생겼다며 우쭐댈 일이 아니었다.

관찰일지 역시 그러하지 않겠는가. 관찰이란 그저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관계 맺음인 것을. 마음을 기울이고 몸을 움직여 함께 보내는 시간인 것을. 관찰은 결국 공감이고 성찰이고 통찰인 것을. 그러니 이제 농사를 짓듯 담장 옆 감나무에 제대로 마음을 기울여보리라. 일 년 열세 달 기록농사를 시작해 보리라. 새해 첫 페이지를 여는 날입니다.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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