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시간이 혼자만의 시간이 되지 않도록...교사가 ‘안전한 울타리’ 될 수 있게 해야”

2025-05-30

지난 3월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의 시간>은 SNS를 사용하는 청소년들의 인셀화를 조명해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비자발적 독신주의자라는 뜻의 ‘인셀’이란 표현은 낯설지 몰라도 SNS에서 번지는 유해한 남성성은 한국에서도 널리 보이는 현상이다. 학교 현장에 있는 교사들은 “<소년의 시간>은 이미 오래전부터 보이던 한국의 교실 같았다”고 말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꿔야 할까. 부산 지역 교사 4명은 지난달 함께 모여 <소년의 시간>을 보고 한국 교실에서 마주하는 고민을 논의했다고 한다. 28년차 초등학교 보건교사 박신영씨(이하 모두 가명), 20년차 고등학교 영어 교사 신현모씨(가명), 11년차 사회 교사 공채영씨(가명), 4년차 중학교 역사 교사 강소희씨를 지난 28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중학교에서 근무하는 공씨는 드라마를 보자마자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을 떠올렸다. 주인공 ‘제이미’는 표정도, 체구도 맡고 있는 학생들과 너무 비슷했다고 한다.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학교에서 벌어지는 여학생과 교사들을 상대로 한 각종 성희롱이 떠올랐다고 했다. SNS에선 같은 반 친구들의 외모 순위를 매기거나 성관계 하고 싶은 순위를 매기는 성희롱들이 비일비재하다. 공씨는 “한국에서도 얼마나 일상적으로 겪을 수 있는 일인지 떠올랐다”며 “아이들은 여자를 좋아하니 혐오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성적대상으로 좋아하는 동시에 인간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소년의 시간> 속 어른들이 청소년들이 쓰는 용어나 인셀을 가리키는 이모지를 이해하지 못하듯 교사들도 교실 안팎에서 쓰이는 아이들의 말이 혐오표현인지 분간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혐오표현으로 쓰이고 있다. ‘제육’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다. ‘제육볶아온나’는 2020년 한 유튜버가 남성이 원하면 여성은 한밤중에도 제육볶음을 요리해 갖다 바쳐야 한다는 뜻으로 말하면서 여성비하 표현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강씨는 “작년 체육대회 때 학생들이 구호로 ‘제육’이라고 외치길래 제육볶음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었다”며 “제육의 의미를 알고선 이런 식으로 쓰이는 표현들이 또 있는지 예의주시하게 된다”고 했다.

혐오표현은 더 이상 특정 온라인 커뮤니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신씨는 “5년 전만 하더라도 ‘일베 하냐’는 말이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일베나 디씨를 모르는 아이들도 혐오 표현을 말한다”며 “인스타그램처럼 아이들이 소통 도구로 쓰는 어디서든 그런 표현을 접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교사들은 유해한 남성성이 학생들 사이에서 훨씬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퍼진다고 체감했다. 최근에는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여자는 남자 말에 말대꾸하지 않는다’ 등 이른바 ‘계집신조’가 적힌 피켓을 들고 사진을 찍어 논란이 되자 학교장이 사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학생들의 SNS를 보고 있으면 댓글 등으로 이러한 표현들이 얼마나 자주 쓰이는지 확인된다. ‘알파메일’이 장래희망이라고 말하거나 성소수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 ‘선크림을 바르지 않겠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학생들도 있다. 강씨는 “마라탕은 여학생들이 많이 먹는다는 뜻에서 계집탕이라고 부르고 먹지 않겠다는 아이들도 있다”며 “이게 10대 남학생들의 표준이라고 보인다”고 했다.

영국은 모든 중등학교에서 <소년의 시간>을 무료 방영하는 것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한국 교사들도 학생 대상 교육자료로 쓰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한다. 백래시에 대한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신씨는 “요즘은 성교육 때 가해자와 피해자 성별 통계만 보여줘도 남학생들이 ‘왜 우리를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냐’고 항의한다”며 “4~5년 전부터 디씨인사이드에도 고등학교별 갤러리가 있어서 ‘페미선생’이라는 저격글이 올라오는 상황”이라고 했다.

교사들은 10여년 전보다 학생들과 페미니즘이나 혐오표현에 대해 얘기하기 더욱 어려워진 분위기라고 토로한다. 공씨는 “2016년에도 학급문고에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꽂아두면 학생들이 ‘선생님 페미냐’고 묻긴 했다. 그땐 답을 하더라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내 답변이 일으킬 파장이나 공격받지 않을지를 고민하게 된다”고 했다.

백래시가 심해진 상황에서 시도때도 없이 장난으로 쓰이는 혐오표현을 당장 어떻게 바로잡아줄지에 대한 고민도 깊어진다. 공씨는 “성차별적 구조에 대한 얘기를 하더라도 교사 개인이 위험부담을 안고 가야 한다. 세계인권기준에도 맞고 앰네스티 같은 기관에서 나온 자료로 차별에 대해 수업하더라도 민원이 들어올 것을 염려한다”며 “교육청이나 학교가 이런 민원에서 교사를 보호하리란 믿음도 없다”고 했다.

교사들 사이에서도 이같은 문제에 대한 온도차가 있다. 강씨는 “아이들이 ‘성소수자가 약자’라고 물어서 맞다고 했는데 다른 선생님은 같은 질문에 ‘아니’라고 답한 경우도 있다”며 “학교나 교육청 차원에서 교육하는 게 아니라 인권 교육에 관심 있는 교사 개인이 알음알음 하다 보니 교육이 모두 거품이 될 때도 있다”고 했다. 강씨는 혐오표현을 장난으로 일삼는 아이들에게 “현실 세계에서 여성들과 어울려 살지 않을 거니”라고 타이르고 넘어가면서도 스스로 장벽을 느꼈다고 했다.

네 사람은 “그래도 아이들을 보면 희망이 없진 않다”고 했다. 강씨는 “학생들과의 유대관계가 정말 중요하다고 느낀다. 이 선생님이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면 아이들은 일단 듣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다. 아이들의 혐오적 사고를 계속 흔들어놓으면 언젠가 바뀌리라 생각한다”고 했다.

이들은 성교육 법제화가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안전하게 젠더교육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박씨는 “인권이나 평등 같은 내용을 시스템적으로 교육할 수 있도록 안전망이 만들어진다면 교사가 학생들과 유대관계를 쌓아가며 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공씨는 “성평등과 혐오표현을 보다 직접적인 법적 근거를 갖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될 때 학생들의 반발도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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