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21세기판 무기대여법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2-10

1939년 9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이 폴란드를 돕기 위해 즉각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것과 달리 미국은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취했다. ‘미국은 유럽 대륙에 관여하지 않을 테니 유럽 강대국들도 미주 대륙에 개입하지 말라’는 먼로 독트린(1823)에 따른 대응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프랑스 편에서 독일과 싸우기 위해 미군을 파병한 전례가 있었다. 자연히 2차대전 초반 미국의 중립 정책 고수를 두고서 ‘연합국과 나치 독일 양측에 모두 무기 등을 팔아 돈이나 벌려는 속셈’이란 비판이 쏟아졌다.

1940년 5∼6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연합국의 일원인 프랑스가 나치 독일의 공세에 굴복하고 그 점령 통치 하에 들어간 것이다. 이제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는 주요 강대국은 영국 하나만 남았다. 나치 독일을 비롯한 파시스트 세력의 세계 지배는 미국이 결코 원치 않는 바였다. 이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은 영국을 돕기로 결심하고 1940년 12월 무기대여법(Lend-Lease Act) 제정을 주도했다. 루스벨트는 “내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나한테 긴 정원용 호스가 있다고 치자. 나 같으면 옆집 사람에게 ‘15달러를 내면 호스를 주겠다’고 이야기하지 않겠다. 대신 ‘호스를 빌려주되 불이 꺼진 뒤 돌려받으면 된다’고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이 지닌 무기를 영국에 무한정 대여하겠다는 것으로, 사실상 미국의 2차대전 참전을 의미했다.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소련(현 러시아)를 침략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했다. 이로써 파시스트 세력에 맞서기 위한 미국·영국·소련 3대국의 연합이 결성됐다. 미국은 무기대여법에 따라 영국은 물론 소련에도 전차(탱크), 군용기 등 무기를 제공했다. 병력 수송용 트럭과 식량 증산을 위한 트랙터도 다수가 소련으로 건너갔다. 이오시프 스탈린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루스벨트에게 “무기보다도 트럭을 더 많이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독일에 비해 산업 기반이 훨씬 취약했던 소련이 잘 무장된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결국 승리를 거둔 배경에는 미국에서 대량으로 받은 무기와 장비들이 있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2022년 5월 미국 의회는 ‘우크라이나의 민주주의 방어를 위한 무기대여법’을 제정했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가 미국산 무기를 거의 무제한으로 빌려 쓸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2차대전 당시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을 돕기 위해 만든 법률을 80여년 만에 되살린 것이다. 그런데 이를 주도한 조 바이든 행정부 임기가 끝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뒤 분위기가 반전됐다. 마이크 왈츠 신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9일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는 미국이 우크라이나 지원에 쓴 비용을 회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의 희토류, 석유, 가스 등 천연자원을 회수 대상으로 지목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대가 지불을 요구한 셈이다. 역시 사업가 트럼프답다. 하지만 ‘21세기판 무기대여법’으로 불린 미국의 우크라이나 군사 원조 방안은 빛이 바래고 말았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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