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겪어봐야 아는 진실이 있다. ‘보수’가 딴 건 몰라도 경제랑 안보만큼은 잘한다는 말을 들어왔다. 이윤과 효율이 우선인 경제는 아무래도 ‘보수’가 더 잘할 것이라고 믿어왔다. 이번 계엄령 사태에 장점이 있다면 이런 근거 없는 생각을 사정없이 내리쳤다는 점이다. 보수적 경제지인 ‘포브스’는 계엄의 대가는 한국인 5100만명이 장기적으로 갚아야 할 할부금이라고 평했다.
미래의 성장동력을 말아먹는 전조는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때부터 확실했다. 과학기술계 예산 삭감에 쓰레기 덕후인 나조차 영향을 받았다. 이게 뭔 소리냐면, 유럽연합(EU)은 마구 쓰고 버린 후 재활용만 깔짝대는 지금의 대응으로는 쓰레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두 가지 근본적인 정책을 도입한다. 하나는 물건 생산 시 자원과 에너지 투입량을 줄이고, 사용 시 최대한 오래 쓰고, 폐기 시 재사용 혹은 재활용되게 하는 에코디자인 규정(ESPR)이다.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물건의 생애 전반에 걸쳐 환경 영향을 줄이도록 한다. 다른 하나는 포장 폐기물 규정(PPWR)으로 재사용과 리필을 의무화하고, 불필요한 포장과 일회용품을 금지한다. 이처럼 EU는 물건과 포장재 쌍방향에 걸쳐 자원순환사회를 위한 제도를 구축했다. 앞으로 EU 내에서는 에코디자인을 준수한 제품만 유통될 수 있다.
에코디자인은 순차적으로 시장에서 판매되는 모든 상품에 적용될 예정이며, 금속·플라스틱·종이와 같은 원료도 검토 중이다. 평가 항목은 에너지 효율 등급, 물건의 내구성 정보와 수리 가능성, 재활용 용이성, 재활용 소재 비율 등이다. 교체가 쉬운 모듈화와 표준 부품 사용, 예비 부품 공급과 가격, 분해 가능성, 수리 정보 제공 등을 평가해 점수로 표시한다. 10점 만점에서 8점과 2점 제품이 있다면 어떤 제품을 사야 할까? 바로 8점 제품이다. 참 쉽죠? 이를 위해 물건에도 디지털 여권이 발급된다. 물건도 환경 영향 정보를 보여주는 여권을 내밀어야 국경을 넘을 수 있다. 이에 더해 대기업은 재고를 폐기할 경우 그 양과 사유를 공개해야 한다. 명품 브랜드 버버리가 브랜드 가치를 지키려 2017년 한 해에만 420억원어치 의류를 불태웠다. 물건은 과잉생산되어 허무하게 ‘화형’당하는데 현재 이 정보는 해당 기업만 안다.
2023년 산업통상자원부는 ‘K-에코디자인 협의체’ 발족식을 열고 ‘자원효율등급제’를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EU의 에코디자인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업계와 논의해 스마트폰과 무선 청소기를 대상으로 시범사업도 하기로 했었다. 얼마 전 유럽의회에서 포장 폐기물 규정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이 들렸고, 나는 1년이 넘은 ‘K-시범사업’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다. 대학원 졸업식에서 R&D 예산 복원하라고 발언하다 ‘입틀막’ 당하고 끌려나간 연구원 꼴이었다. 외환위기 때도 줄지 않았던 과학기술 예산의 삭감으로 시범사업이 전면 취소되었다.
각국의 환경 규제는 기후위기 대응책이기도 하지만 무역 장벽을 치는 경제적 전략이기도 하다. 이 시범사업이 환경부가 아니라 산업부 담당인 이유다. EU에 수출 안 하기로 작정한 걸까. 대통령 잘못 뽑아서 잘 알지도 못하는 경제와 산업 걱정까지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