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대 이후 국제 마라톤 대회와 올림픽에서 단연 눈에 띄는 국적은 케냐다. 남자 장거리 육상에서는 상위 입상자 대부분이 케냐 선수인 경우가 흔하다. 전문가들은 “세계 마라톤의 지형도는 사실상 케냐와 에티오피아 양강 구도로 재편됐다”고 분석한다. 그 중심에는 케냐 내 소수 부족 ‘칼렌진(Kalenjin)’이 있다. 인구 비중은 10% 남짓에 불과하지만, 세계 마라톤 우승자의 대부분을 배출한 집단이다.
필자는 최근 스포츠 생리학과 에너지 대사를 연구하며 지난 4월 케냐를 두번째로 방문했다. 현지 엘도렛(Eldoret), 이텐(Iten), 캅사벳(Kapsabet) 등 해발 2000m 이상 고원지대에서 선수들이 어떻게 훈련하고 생활하는지를 직접 살펴봤다. 그 결과, 이들의 놀라운 퍼포먼스는 단순한 개인의 재능이 아닌 총체적 조건의 결합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주목할 점은 고산지대 특유의 저산소 환경이다. 동아프리카 대지구대에 자리 잡은 이 지역은 평지보다 산소 분압이 10~15% 낮다. 이 같은 환경에서 오랜 세월 적응해 온 칼렌진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폐활량이 크고, 적혈구 수와 헤모글로빈 농도가 높다. 또한 말초 혈관의 발달로 산소 운반과 확산 능력이 뛰어나, 이른바 ‘선천적 고지대 훈련 효과’를 타고난 셈이다.

이들의 신체 구조 역시 경제적인 달리기에 최적화돼 있다. 머리와 몸통이 작고 팔다리는 가늘고 긴 체형으로, 질주 시 공기 저항을 줄이고 보폭을 넓히는 데 유리하다. 여기에 근육의 70~80%가 지구력에 적합한 Type I 섬유(지근)로 구성돼 있어, 낮은 산소 조건에서도 지방을 산화시켜 오랫동안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케냐 마라토너만의 강인한 정신력은 간과할 수 없는 요소다. 많은 선수들이 마라톤을 ‘생존의 수단’으로 여긴다. 세계 무대에서 우승한 선배들이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그 길을 따르겠다는 열망으로 달린다. 이들은 하루 1500~2000㎉ 수준의 적은 열량만을 섭취하며 훈련을 소화한다. 식사는 옥수수죽 ‘우갈리(Ugali)’, 밀전병 ‘차파티(Chapati)’, 채소 약간이 전부지만, 이런 단순한 식단 속에서 오히려 신체는 에너지 효율성을 극대화시킨다.

현지에는 선수들이 모여 생활하고 훈련하는 캠프가 여럿 존재한다. 한 캠프에는 10~30명이 함께 달리며 자연스럽게 훈련과 경쟁이 일상화된다. 일정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선수는 캠프에서 밀려나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달린다. 또 현지에서는 비공식 지역 대회가 수시로 열리며, 이 역시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고 기록을 끌어올리는 중요한 기회가 된다.
결국 케냐 마라토너의 질주는 고산 지대라는 자연환경, 에너지 효율에 최적화된 체형과 유전자, 절박한 생존 본능, 집단 경쟁 문화, 단순한 식생활과 정신적 집중력 등 다양한 요소가 총합된 결과다. 이는 인위적인 프로그램만으로는 결코 모방할 수 없는 ‘자연 기반의 스포츠 생태계’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첨단 장비와 훈련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인간 그 자체의 동기, 절박함, 그리고 매일의 훈련에 임하는 태도다. 케냐의 마라토너들은 우리에게 스포츠가 본래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묻고 있다.
<이윤희 파워스포츠과학연구소 대표 겸 대한육상연맹 의무위원>
<스포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