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사람들

침묵을 깨고 누군가 입을 열었다. 팀장이라 불린 남자가 가져온 하얀 A4 용지 속 빽빽한 글자를 들여다보는 이재명 캠프 메시지팀원들의 미간이 저마다 좁혀졌다.
흰 종이 속, 한 줄이 형광펜으로 강조돼 있었다.
‘박정희면 어떻고, 김대중이면 어떻나?
정책에는 빨간 정책도 파란 정책도 없다….’
20대 대선을 한 달 남긴 때였다. 상대 당이 내세운 검찰총장 출신 후보는 특유의 걸걸하고 시원시원한 언행으로 인기를 높여갔다. ‘정치 초보’라고 얕볼 게 아니었다. 한겨울, 코로나19의 한복판에 민심은 얼어붙었고, 선거운동은 제한됐다. 중도층은 이쪽에도 저쪽에도 눈살을 찌푸렸다. 하루 걸러 발표되는 여론조사에서도 양측은 오차 범위 내를 맴돌 뿐 약진하지 못했다.
소년공 출신, 사이다 발언, 경기지사 업적…이런 수사만으론 꿈쩍 않는 중도층 마음을 흔들 수 없지 않나. 중도층이, 중산층이, 아니 부자들마저도 ‘이재명도, 민주당도 괜찮겠다’ 믿게 해야 했다.
간밤 이런 고민에 머리를 싸매고 텅 빈 사무실에 남아 있던 그에게 문득 떠오른 이름이 ‘박정희’였다. 왜 우리는 박정희를 말하지 못하나. 눈앞이 트이는 느낌 속에 연설문 초안을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회심의 연설문을 제안하자마자 빗발치는 반대는 윤 팀장의 기를 꺾고 있었다. “‘흑묘백묘(黑猫白猫)’라는 좋은 말이 있다”부터 “박정희 얘기를 굳이 하냐”까지…틀린 말들은 아니었다.
무난하게 갈까, 질러볼까. 10여 분을 고민한 끝에 윤 팀장은 책상에서 종이를 그러쥐고 후보 방을 향해 성큼 걸음을 옮겼다. ‘퇴짜 맞을 땐 맞아도, 내밀어나 보자.’
“어, 윤 팀장님 줘보세요.”
방문을 열고 들어간 그가 내민 종이를 이재명이 받아들었다.
“좀 논란은 있을 수 있습니다.”
변명 같은 말을 재빨리 덧붙이자 이재명이 고개를 들어 그를 잠깐 쳐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비주류’에서 민주당의 강력한 대선후보로, 다크호스처럼 나타난 이재명이 당의 오랜 금기를 깨는 순간이었다. 석패한 20대 대선에서도, 결국 승리한 지난 대선 때도 이재명은 “박정희 정책이라도 좋으면 쓴다”며 이념보단 실용 중시의 이미지를 강하게 인식시켰다. 그리고 그 균열의 계기를 만든 건 이재명의 메시지팀장 윤종군이었다.
이제는 대한민국 대통령과 초선 국회의원이 된 두 사람의 첫 만남은 2020년 12월, 경기도청에서다. 이때로부터 3년 전 문재인과 이재명이 민주당 대선후보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싸운 경선에서 윤종군은 문재인 캠프 연설문을 담당했다. 당선된 문 대통령을 따라 청와대 연설비서관실 행정관까지 지냈다. 행정관을 그만두고 안성시장 선거에 나갔지만 낙선해 앞날을 고심하던 때, 오래 알던 지인이 이재명 경기지사가 제2정무수석을 뽑으니 지원해 보라 귀띔해 왔다. 백수나 다름없던 처지. 거절할 명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길로 서점에 가서 ‘이재명’ 이름 들어간 책은 다 찾아서 사 왔죠. 일곱여덟 권인가, 며칠 안에 읽어 치웠어요. 그 전엔 이재명이란 사람 잘 몰랐죠. 경선에서 난 문재인 쪽이었으니 사실 이미지가 좋지 않았고요. 사람이 좀 호전적이다, 거칠다 생각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