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만난 양국 총리
‘2차대전 과거사’ 놓고 언쟁
많은 한국인은 1970년 12월 빌리 브란트 독일(당시 서독) 총리의 폴란드 방문을 기억한다. 브란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희생된 폴란드 유대인들의 묘지를 참배했다. 겨울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그는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한참 동안 참회했다. 다수가 이를 “진정성 있는 사과”라고 칭송하며 독일·폴란드 간 과거사 문제는 끝난 것처럼 여긴다. 과연 그럴까.

1일(현지시간) dpa 통신에 따르면 이날 베를린을 찾은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점령을 겪고 생존해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와 만난 투스크는 “독일이 정말 화해의 제스처를 원한다면 서둘러야 한다”며 “나치 독일의 폴란드 점령을 경험한 생존 피해자가 꾸준히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독일·폴란드 화해 재단에 의하면 폴란드 내 생존 피해자는 2024년 7월만 해도 6만명에 달했으나, 1년 5개월가량 지난 지금 5만명으로 크게 줄었다.
폴란드가 독일에 지급을 요구한 2차대전 배상금은 엄청난 액수에 달한다. 지난 9월 처음 독일을 찾은 카롤 나브로츠키 신임 폴란드 대통령은 독일 정부에 무려 1조3000억유로(약 2217조원) 규모의 청구서를 내민 바 있다. 당시 메르츠는 물론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도 폴란드의 이 같은 요구에 단호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날 투스크와 정상회담을 한 메르츠는 배상 여부나 배상금 액수 등에 관해 말을 아꼈다. 그는 회담 후 언론에 “현재로서는 어떤 수치도 공개할 수 없다”며 “그러나 독일 연방정부는 이웃 폴란드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매우 잘 알고 있으며, 앞으로도 서로 대화를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물론 과거사는 끝나지 않은 문제”라면서도 “독일의 관점에서 배상 문제는 수년간 법적·정치적으로 이미 해결됐다”고 덧붙였다. 폴란드의 거듭되는 요청에도 기존의 부정적 태도를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풀이된다.
2차대전은 1939년 아돌프 히틀러 총통이 이끄는 나치 독일 군대가 폴란드를 침략하며 발발했다. 전쟁 기간 독일의 점령 통치를 받은 폴란드는 1945년 종전 후 소련(현 러시아)의 위성국이 됨과 동시에 공산화의 길을 걸었다. 당시 패전국 독일이 폴란드에 배상금을 무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전쟁의 결과 독일은 동서로 분단됐다. 공산주의 동독은 소련의 비호 아래 폴란드에 대한 배상 책임을 면제 받았다. 동독과 별개로 서독은 1970년대 폴란드에 거액의 차관을 제공함과 동시에 전시 강제 노역에 동원된 폴란드인 48만명한테 개별 보상금도 지급했다. 서독 정부는 이로써 폴란드와의 과거사 문제가 일단락된 것으로 간주했다.

1990년 동·서독 통일 이후 옛 동독의 모든 권리·의무를 승계한 독일은 1953년 동독과 폴란드 간에 체결된 ‘면제 협정’을 들어 양국 간에 더는 배상 문제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폴란드는 2010년대 들어 민족주의 운동이 고개를 들며 태도가 바뀌었다. 오늘날 폴란드 정부는 “1953년 면제 협정은 소련의 강압으로 체결돼 무효”라며 “독일은 2차대전 당시 폴란드와 폴란드 국민의 피해를 제대로 배상해야 한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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