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정부 '북극항로 멘토'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

북극항로는 러시아 북쪽 북극해를 지나는 새 뱃길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해빙(解氷)의 산물이다. 북극항로의 가장 큰 매력은 경제성. 통상 아시아와 유럽을 오갈 때 이용하는 남쪽 길(수에즈 루트)보다 거리가 7000㎞가량 짧고, 운항 시간도 열흘 정도 단축할 수 있다. 에너지·해운·조선 등 여러 분야에서 큰 변화를 가져올 거란 전망이 많다.
북극항로 개척을 국정과제로 내세운 이재명 정부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을 빠르게 확정한 데 이어 대통령실 내 해양수산비서관을 신설했다. 관련 예산은 20% 이상 증액한 5500억원으로 늘려 잡았고, 범정부 지원 조직인 ‘북극항로 추진본부’도 연내 출범한다.
이 대통령이 북극항로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기까지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고, 멘토 역할을 해온 이가 있다.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다. 그는 수년 전부터 “북극항로엔 단순한 물길 이상의 지정학적 가치가 있다”고 강조해 왔다. 해수부 북극항로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김 교수를 11일 오후 서울대 관악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났다.
이 대통령과는 인연이 있었나.
“북극항로 개척을 대략 10년 전부터 주장했지만, 관심을 못 받았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지난해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북극항로를 언급했고, 이후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은 후 해수부 이전을 시작으로 거점항구 확보 등을 본격적으로 착수하겠다고 약속하더라. 학자가 아무리 열심히 연구해도 정책으로 구현되지 않으면 아이디어에서 끝나는 거 아닌가. 이 대통령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면 북극항로는 지금도 수면 아래에 있을 거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정학적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자
러, 중·일보다 한국 호감도 높아
트럼프도 푸틴과 관계 개선 가능성
한국, 북극항로 업고 가교 역할을
지금 왜 북극항로를 이야기할까?
“북극항로가 경제적이란 건 말할 필요가 없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는 분업이다. 스마트폰 하나를 만들기 위해 수십 개국의 부품과 재료가 모인다. 그만큼 물동량이 많아진다. 현재 주요국은 수에즈 루트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믈라카해협의 적체에서 보듯 이미 포화 상태다. 또한 남쪽 루트는 늘 전쟁 위험에 노출돼 있다. 남중국해에서 중국·대만·베트남·필리핀은 끊임없이 갈등을 빚고 있다. 2023년엔 예멘 반군이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선박을 공격한 사건도 있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한국은 수출입으로 먹고사는 나라다. 대체루트 확보 차원에서도 준비해야 한다. 더구나 북극항로는 단순한 물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무슨 의미인가.
“유럽은 여러 나라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다. 상황에 따라 주변국과 동맹을 맺고 균형을 맞췄다. 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역사적으로 외교의 기본 원리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이다. 멀리 있는 나라와는 협력하고, 가까이 있으면 싸우게 돼 있다. 신라는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고구려를 누르고 한반도의 주인이 됐다. 이후엔 달랐다. 고려·조선을 거치며 육지로는 중국, 바다로는 일본에 막혀 원교의 대상이 없어져 버렸다. 조상 대대로 침략을 받아온 이유다. 일종의 지정학적 저주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북극항로를 활용하면 러시아가 새로운 원교 대상이 될 수 있나.
“전쟁이 끝나도 러시아와 유럽의 관계는 빨리 회복되기 어렵다. 러시아는 동쪽으로 올 수밖에 없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건 전후 대불황이다. 당장은 천연가스·석유를 팔 새 수요처를 찾아야 한다. 일단은 한·중·일이다. 현재로선 러시아가 중국과 밀착한 듯 보이지만 중국이 계속 발전하는 건 러시아에도 위협이다. 국경을 맞댄 나라끼리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일본과는 1세기 전에 전쟁을 치렀고, 지금도 영토 분쟁 중이다.”
러시아가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원할 거란 뜻인가.
“한국은 아무리 커져도 러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다. 인구나 경제 규모 면에서 중국과는 다른 점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중국과 일본이 근공의 대상이라면, 한국은 좋은 원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산업구조도 완벽히 보완 관계에 있고, 여러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 대한 호감도도 높다.”
국정과제 된 북극항로 개척
부·울·경에 북극항로 거점항구
호남·강원권 등으로 효과 번져
수도권 집중 깨고 균형발전 될 것
보완 관계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
“농업사회에서는 근공이 전쟁이지만 산업사회에서의 근공은 경쟁이다. 지금도 한·중·일은 자동차·반도체·배터리 등 산업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인다. 한국과 러시아는 다르다. 러시아는 한국이 없는 자원을 가졌고, 한국은 기술이 있다. 서로를 위해 필요한 존재다.”
러시아는 지금도 전쟁 중이다.
“흔한 오류 중 하나가 미국이 러시아를 적국으로 생각한다고 보는 것이다. 지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동을 보자. 캐나다·멕시코, 서유럽 등 그간 친했던 나라는 압박하면서 푸틴과는 어떻게든 관계 개선을 하려고 한다. 미국의 절대 목표는 미국에 도전하는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러시아와의 협력은 필수다. 외교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역발상을 해야 한다. 한국이 양국 간의 가교 구실을 할 수도 있다. 미·중 간 패권 경쟁의 양상에 따라 향후 동북아 지역의 국제 질서는 큰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북극항로의 주도권을 잡는 건 지정학적 저주를 지정학적 축복으로 바꿔 갈 중요한 기회다.”
중국 컨테이너선이 북극항로 첫 상업 운항에 성공했다.
“중국은 빙상 실크로드를 선언하고, 전쟁 와중에도 꾸준히 북극항로 운항 실험을 해왔다. 일본은 서방 제재 중에도 러시아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프로젝트 지분을 빼지 않았다. 겉으론 제재하는 척하지만, 속으론 치열하게 전쟁 후를 준비하고 있는 거다. 북극항로 개발은 해빙 무드가 조성되면 그때 해도 늦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조건이 갖춰지고 들어가면 한국이 중국·일본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나? 시간이 많지 않다.”
북극항로가 시기상조란 반론도 있다.
“해운업계를 장악한 유럽 선사 등을 중심으로 반대 움직임이 있다. 기득권을 가진 쪽은 언제나 변화를 싫어한다. 아직 여러 제약 요인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해결할 수 있다. 북극항로는 향후 수십 년간의 국가 비전을 논하는 프로젝트다. 기업 논리를 따를 게 아니라 정부가 주도권을 쥐고 가야 한다.”
북극항로 거점항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흘러가는 상권이 아닌 머무는 상권이 돼야 한다. 유럽만 놓고 보면 베네치아·리스본·로테르담 등이 머무는 상권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렇지만 거점항구는 제국의 심장이다. 거점항구에서 물류를 장악하면 경제를 장악하고, 산업 기술을 장악하게 된다. 안보·문화도 따라온다. 거점항구가 없으면 이건 북극항로 가치의 한 80%를 버리는 셈이다.”
국내 유망 지역을 꼽는다면.
“이른바 부·울·경엔 이미 인프라가 있다. 부산을 중심으로 큰 항구가 있고 이를 활용해야 초기 비용을 줄이고, 속도를 낼 수 있다. 거점항구가 되려면 벙커링(연료 공급) 시설이 필요하고, 장기적으로는 천연가스·수소·암모니아 같은 청정연료를 공급할 수 있다는 강점을 부각해야 한다. 국가적으로도 부·울·경 육성을 통해 대칭 균형을 딱 만드는 게 시급하다.”
대칭 균형이란.
“지금까진 수도권 집중이 나라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잠재성장률 추락의 근본 원인인 저출산도 바로 집중의 폐해다. 20년 전부터 균형발전 정책을 썼지만 사실상 실패했다. 균형은 전체를 평평하게 하는 게 아니다. 국가 산업 전략을 짤 때도 100가지가 있는데 다 잘하자 이러는 건 말이 안 된다. 한두 개 핵심만 골라서 집중해야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 부·울·경을 제2의 수도권으로 키워 대칭 균형을 만드는 게 진짜 균형발전의 출발점이다. 이게 성공하면 호남권·강원권 등 타 지역으로도 효과가 퍼지게 돼 있다.”
북극항로 개발 논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
“16세기 마젤란은 270명의 선원과 배 5척에 나눠 타고 세계 일주를 떠났다. 딱 한 척, 18명만 살아서 돌아왔다. 희생을 무릅쓰고 도전했기 때문에 이후 스페인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거다. 아무런 희생도 없이 북극항로를 거저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단 내부적으로 의견 일치를 이루는 게 중요하다. 해보기도 전에 여야가 갈라져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거북선을 만드는 데 동인·서인이 어디 있나. 필요하면 만드는 거지. 국민도 우리같이 작은 나라가 뭘 하겠냐 하는 패배 의식부터 벗어던졌으면 한다. 인공지능(AI) 시대에는 영토, 인구 규모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패권국이 될 수 있다. 제대로 준비하면 북극항로가 한반도 다음 세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김태유 교수는=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콜로라도CSM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87년부터 서울대에 재직했다. 참여정부에서 대통령 정보과학기술 보좌관을 지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이며 한국자원경제학회장을 역임한 자원·에너지 분야 석학이다. 퇴임 이후에는 『국부의 조건』 『대한민국 마지막 기회가 온다』 등의 저서를 통해 국가 발전론에 대한 다양한 방향성을 제시해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