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신호’다 : 탈진실, 수풀에 머리를 숨긴 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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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신호’다 : 탈진실, 수풀에 머리를 숨긴 사슴

Is truth dead?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144), 2025.1.15,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웹에서 보기 Web link

키워드: 탈진실, 예언, 위험, 현실, 관찰

1.머리말

2.꾸며낸 이야기는 원래 달콤하다 : <예언이 끝날 때>

3.그럼에도 ‘굳이’ 진실이 필요한 이유 : 위험 직시하기

4.탈진실에 빠진 이들은 과연 행복한가? : 진정한 자기중심주의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연구자님은 ‘탈진실’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탈진실post-truth이란 사실 관계, 근거와 전혀 상관없이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 현상을 뜻하는데요. 예를 들면 ‘홀로코스트란 꾸며낸 거짓이다’ ‘외국인 이민자들이 아이를 납치한다’ ‘지구는 평평하다’ 등과 같은 전혀 근거가 없지만 마치 사실인양 말하는 주장들입니다.

2016년 브렉시트*, 미 대선 이후 옥스퍼드 사전은 'post-truth'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기도 했었죠.(링크)

*브렉시트Brexit = 영국(Britain)과 탈퇴(exit)의 합성어. 영국은 2016년 6월 국민투표를 통해 EU 탈퇴를 결정

경찰 국가수사본부가 대통령실 압수수색을 시도한 지난해 12월11일 용산 대통령실 앞에 ‘부정선거 바로잡는 윤석열 대통령’ 등의 글자가 적힌 화환이 놓여 있습니다. (왼쪽) 트럼프와 탈진실에 대한 기사가 실린 2017년 4월 지의 표지. 탈진실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 경향신문, TIME(링크)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극우유튜브 문제가 떠오르면서 함께 ‘탈진실’이라는 단어가 이슈가 되고 있는데요. 이들이 대표적으로 하는 말은 “언론을 믿지 마, 유튜브를 믿어”라는 말이죠.(링크)

일각에서는 ‘탈진실’ 문제를 ‘플랫폼(유튜브, SNS 등) 문제’로 보기도 합니다. 가짜뉴스를 방치하는 플랫폼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콘텐츠만 계속 보게 하는 알고리즘의 문제라는 건데요.

물론 플랫폼 책임 문제도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만, 사실 탈진실, 가짜뉴스의 역사는 유구합니다. 19세기 이전에는 대중 신문에 ‘뉴스’보다도 사실무근의 썰이나 눈길을 끄는 황당일화, 흥미로운 가짜뉴스가 가득했다고 하고요. 가짜뉴스라고 해서 꼭 남을 혐오 비방하는 목적, 악의만 있는건 아니었습니다1). 신문이 없던 시절에도 대중은 어떤 소식을 듣든 거기에 ‘근거’가 있는지보다도, 그게 얼마나 재밌고 내 기대와 맞아떨어지는지에 따라 소식을 전파하기도 했습니다.2)

*

제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탈진실이 유서깊은 전통(?)이니까 그냥 냅두자거나, 사실이 필요 없다고 말하려는 건 당연히 아닙니다.

다만, “탈진실 나빠!”라는 말론 일단 설득이 잘 안됩니다.

어쩌면 그보다는 탈진실의 서사가 대체로 원래부터 사람에게 진실보다도 매력적이라는 것을 인정을 하고, 그럼에도 우리가 굳이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를 새삼 생각해보는 것을 통해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색다른 동력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가 이번 레터에서 궁리해보고 싶은 질문은 “굳이, (지루한) 진실을 추구하는 건 무슨 이득이 있는가?”입니다.

<예언이 끝났을 때>(레온 페스팅거 외), <무지의 역사>(피터 버크), <신극우주의의 양상>(테어도어 아도르노) 등을 지팡이삼아 보았습니다.

1) 1874년 뉴욕헤럴드지는 동물원에서 맹수들이 우리를 탈출해 사람들을 습격해 59명이 사망했다는 '가짜뉴스'를 대서특필했습니다(링크). 물론 그 아래에는 조그만 글씨로 '모든 이야기는 순전히 날조입니다'라고 쓰여있긴 했다고 합니다만(...) 워낙 규모가 큰 '뻥'이어서 19세기의 대표적 가짜뉴스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과거의 가짜뉴스는 대체로 딱히 오늘날의 가짜뉴스처럼 어떤 프로파간다적인 목적을 갖고 혐오, 음모를 조장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눈길을 끌고 깜짝놀라게 해서 마구 구입하게 만드는 목적 정도였다는 거죠.

2) 지난 2018년 가짜뉴스일수록 SNS에서 더 빨리 퍼진다는 연구 결과(링크)가 많은 사람들을 탄식하게했습니다만,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듣고 싶은 매력적인 얘기만 가려 듣고 전파하는 건,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한 산문에서 자신이 듣기 싫은 진실은 못들은척하고, 반대로 자기가 듣고싶은 썰은 근거가 없더라도 나서서 믿고 퍼뜨리는 풍속을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보라. “만주 사람은 말하는 것이 개 짖는 소리와 같고, 먹는 음식은 냄새가 나서 가까이 하지 못한다. 심지어 뱀을 시루에 쪄서 씹어 먹고, 황제의 누이가 역졸과 바람을 피워 가남풍이 했던 추잡한 음행을 곧잘 행한다.” 그들은 틀림없이 크게 기뻐하여 내가 한 말을 여기저기 전달하느라 바쁠 것이다. 내가 예전에 사람들에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왔는데 그런 일이 전혀 없다”고 힘주어 말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끝내 개운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아무개 역관이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내가 여러번 남들과 논쟁을 벌였는데 나를 비방하는 자가 제법 많았다. -박지원, 조선인의 편견(<궁핍한 날의 벗> 중)

【2.꾸며낸 이야기는 원래 달콤하다 : <예언이 끝날 때>】

“확신에 찬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그에게 “나는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해보라. 그는 외면할 것이다. 그에게 사실관계 정보와 수치 근거들을 제시해보라. 그는 출처를 의심할 것이다. 그에게 논리적으로 반박해보라. 그는 당신 말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 마지막으로 그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증거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많은 경우, 단지 믿음을 유지하는 정도를 넘어서 그 믿음에 한층 더 강한 확신을 갖게 된다”

-레온 페스팅거 외, <예언이 끝났을 때>

기본적으로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이야깃거리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기꺼이 믿고 싶어질만큼 굉장히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하다는 것이죠.

애초에 사실 여부보다도 매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심지어 그 이야기가 ‘새빨간 거짓’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또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더라도 엉뚱하게도 오히려 믿음은 더 강해지곤 합니다.

*

레온 페스팅거 등이 쓴 미국 사회심리학의 고전 <예언이 끝났을 때>(1956)는 1954년 세상이 홍수로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한 한 컬트종교집단을 관찰한 책인데요.

1954년 12월 21일 예언자 ‘키츠 부인’을 비롯한 ‘믿는 사람(구도자)’들은 거대한 홍수가 와서 세상이 멸망하고, 외계 비행접시가 와서 소수의 구도자들을 데려갈 것이라는 내용의 예언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예언의 날, 사람들은 키츠 부인의 집 마당에 모여 간절히 두손을 모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들을 하늘로 데려갈 비행접시를 기다렸죠.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이들이 ‘속았구나!’ 싶어서 절망하고 시무룩해졌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이들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후 오히려 신도들은 적극적으로 새로운 예언과 변명들을 이끌어내고(‘새로운 예언이 방금 도착했는데 날짜가 더 뒤였다고 하네요’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해서 재앙이 물러갔대요’...), 심지어 더 열렬히 서로 의지하고 언론과 인터뷰하고, 적극적으로 전도에 나서기까지 했죠.

<예언이 끝났을 때> 영문판 책 표지. 이 책은, 예언된 '종말의 날'이 지난 [이후] 집단 내부의 심리적 변화, 변명의 진행 과정 등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왼쪽) 책에서는 가명(키츠 부인)으로 적혔던, 예언자 도로시 마틴과 라우그헤드 박사(가명 닥터 암스트롱)가 원래 예정돼있던 종말의 날인 12월 21일으로부터 3일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날에도 외계인 소환에 실패하고 인파 속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 / Amazon, AP

오늘 ‘탈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책을 가져와본 이유는 이 책 속 사람들이 탈진실 이야기에 빠져들고, 또 그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이 책을 펼친 독자들은 ‘왜?’라는 질문을 머리에 넣고 읽어가게 됩니다. 대체 사람들은 왜 명백하게 자신의 믿음이 틀렸다는 게 드러났는데도 오히려 자신이 틀렸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더 믿음을 강하게 가졌을까요?

책을 읽다보면 핵심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들어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ㄱ. 이야기의 매력

ㄴ. 집단 효과

ㄱ. 이야기의 매력 = 우선, 예언이 품은 이야기는 매력적이었습니다. 예언은 ‘당신은 선택받은 존재’라고 소중하게 여겨주었고, 세상의 핍박과 무지에 맞서는 고난이라는 서사를 내려주는 동시에 마지막으로 성공(구원)을 약속하기까지 했죠. 이는 ‘가짜예언’이라는 점만 빼면 아주 오래된 영웅담의 전형적인 스토리라인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이 ‘나’인 영웅담이죠.

“비행접시에 관심이 있는 여러분들은 모두 특별한 범주에 있습니다 [...] 이세상 사람 중에서 특별히 비행접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자신도 잊어버린 것들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행접시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온 페스팅거 외, <예언이 끝났을 때>(이하 동일)

얼핏 이런 예언은 오늘날 잔뜩 떠도는 음모론이나 가짜뉴스 서사와 차이가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만, 핵심적인 부분에선 연결이 됩니다.

음모론의 핵심 매력 역시 ‘세상의 진실에 맞서 대응하는 나(주인공)!’이기 때문이죠. 기본적으로 모든 음모론은 (마치 단지 정보를 얘기하는 것 같지만) 배경에 서사를 가지고 있는데요. 그 중심은 세상의 가운데서 남들은 모르는 은밀한 진실을 알고 있는 주인공인 나입니다3).

이야기에 매력을 느낄수록, 거기에 높은 헌신을 하게 되고, 더 헌신을 많이 함으로써 그것을 포기하기 어렵게 되는 되먹임 구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구도자’들은 일상에서 믿음으로 인해 조롱을 당하기도 했는데, 조롱은 오히려 서사에서 ‘감내해야 할 고난’이 되어 믿음을 강하게 해줄 뿐이었고요. 이는 자처한 것이기도 했고, 때론 강요되기도 했습니다.

* 키티는 “구도자” 모임에 매번 참석했고 간식 시간에 제공되는 케이크를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했다. 술을 끊었고 담배도 끊으려고 노력했다. 또 채식을 시작했다…

* 그가 여러차례 말했듯이, “지상에서의 모든 끈도 포기했다.” […] 그는 귀하게 여기던 소유물들을 일부 팔아 빚을 갚았다 […] 그는 모임 외부의 학생들에게 자신의 믿음에 대해 거리낌없이 이야기했고 [...] 그들의 조롱을 견뎌냈다.

ㄴ. 또한,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집단’ 안에 소속되어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예언을 믿고, 같은 정도의 헌신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일정기간 모임을 떠나있어야만 했던 사람들은 약간의 고통을 겪긴 했지만 결국 스스로 현실을 인정한 반면, 마지막까지 ‘함께 믿는 사람끼리’ 있었던 이들은 강한 믿음으로 서로를 다독일 수 있었죠.

이를 단순히 ‘집단 안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정도로 끝낼 게 아니라 - 한발 더 들어가보면, 집단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다같이 힘을 모아 눈을 가린 것’이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힘을 모아 숙의하고 진실을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진실을 외면하는 단서들을 끌어모으고 비판적인 사고를 포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습니다.4)

*

사람들은 이처럼 비록 자신이 믿던 예언이 어긋나 온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게 되었더라도, 새로운 허풍과 매력적인 거짓 증거들을 모아 믿음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함께 읽으신분들이라면 짐작하시겠지만, 이들에게 있어선 애초부터 진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팩트로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했죠. 이들에게 있어서는 진실보다도 가짜 상상 쪽이 훨씬 더 매력적이고 안락했던 것입니다.

3) 사람들이 음모론에 빠지는 중요한 유인 중 하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입니다.(<썰의 흑역사>, p.61) 평범했던 내가 소수의 진실의 수호자가 된다니, 이보다 멋진 일이 있을까요? 실제로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해 온 '지구평평론자'들은 스스로 "빨간약을 먹었다"며 스스로를 영화 <매트릭스> 주인공 네오에 자주 비유하기도 했습니다.(링크)

4) 일반적으로 플랫폼에 떠도는 가짜뉴스 얘기를 할 때 콘텐츠 자체의 '자극성'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아무리 콘텐츠가 자극적이더라도 주변의 반응이 심드렁하다면 그 콘텐츠로부터 별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음? 별거 아닌가?'). 이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꼭 자신의 믿음에 반대되는 주장에 접하고 격파당하지 않더라도, 같은 예언을 믿었던 사람 중 일부는 단지 그곳에서 잠시 떨어져있어서 '집단 내부의 강화효과를 받지 못한' 것만으로도 예언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고보면 사실은 콘텐츠의 '내용 자체'도 중요하지만, 오프라인 모임과는 달리 카톡방, 유튜브 댓글 등의 (365일 24시간 함께할 수 있는) '커뮤니티'로서의 역할이 믿음을 더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3.그럼에도 ‘굳이’ 진실이 필요한 이유 : 위험 직시하기】

너무 당연해서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질문입니다만, 그럼에도 진실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빠져든 ‘상상 속 이야기’가 얼마나 매력적이든 간에 결국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것은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키치 부인의 종교 모임은 ‘예언이 끝난 후’ 새로운 변명거리로 구름성을 쌓으며 영영 행복하게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시간이 흘러도 몇번이고 새로운 변명과 매력적인 예언들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상상 속에서 나는 구원을 기다리는 특별한 구도자였지만 외계인은 나를 계속 외면했고, 일자리는 없어진지 오래고, 주변엔 친구들도 사라지고 조롱만 남았고, 가족은 아팠고, 통장에 돈은 바닥이 났고, 시간은 자꾸자꾸 흘렀지만 예언은 계속 틀리기만 했습니다. 어느 순간엔 “임계점”이 찾아왔고, 아무리 서로 가짜 이야기로 북돋는다고 해도 냉정한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죠.

또한 진실은 우리가 현실의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신호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추구해야 할 가치’라든지 ‘사회정의’ 차원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라요.

이야기에 과하게 몰입하면 사람들은 타인을 해치거나 잘못된 신호로 인해 현실에서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

영국의 역사학자 피터 버크는 <무지의 역사>에서 독특하게도 지식의 역사가 아닌 ‘무지’의 역사를 다루는데요.

이 책에서 다루어진 다양한 종류의 무지 중에서도 ‘탈진실’의 핵심은 의도된 무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진실이 있더라도 의도적으로 그것에 눈을 감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의도된 무지란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전거 위에서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하며 눈을 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 잠깐의 위안은 얻을 수 있을지라도, 결국 현실에서는 더 큰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지의 역사Ignorance> 책 표지 (왼쪽) 케임브리지대학 역사학 교수인 피터 버크. 그는 <무지의 역사>에서 무지의 다양한 측면, 그 중에서도 '알기를 거부하는' 무지에 대해 주목합니다. / 한국경제신문, fronteiras

책을 읽으며 저는 의도된 무지를 크게 아래의 두 갈래로 나누어 보았는데요.

1. “모르는 것” = 가짜 이야기로 둘러싸인 권력자

2. “모르게 하는 것” = 프로파간다

1.우선, ‘모르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를 수 있는 권력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기 집이 폭우로 인해 침수가 된 사람은 알기 싫어도 침수에 대해 알 수밖에 없겠죠.

특히 권위주의적인 왕, 권력자일수록 불편한 사실을 지적받지 않고 - 문제 상황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모른 채 있을 수 있습니다. 불편한 사실을 지적하는 비판자들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해 비판을 금지하고 내칩니다. 그렇게 권력자는 자신의 주변에 탈진실의 ‘이야기’로 성을 쌓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비판자의 지적이 불편한 ‘진실’이며 비판을 금지한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권력이 통하는 지점까지이기 때문에 얼핏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더 악화되고 있을 뿐입니다.

피터 버크는 <무지의 역사>에서 이처럼 ‘가짜 환상’ 속에 둘러싸인 채,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권력자들의 사례들을 소개합니다.

* 그리고리 포템킨은 러시아 예카테리나 대제의 연인이자 장관이었다. 1787년 예카테리나가 유람선을 타고 드네프르강을 따라 러시아 남부를 방문하기로 했을 때, 포템킨은 그녀가 가장 부유한 마을만 볼 수 있도록 건물 외관을 꾸미거나 가짜 건물을 이리저리 옮겨 배치했다고 한다.

*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은 무지와 오만이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당시 가장 큰 화근은 히틀러가 전장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라스텐부르크 ‘늑대 소굴’에서 장군들을 직접 통제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었다[…]1943년 1월 전령이 히틀러에게 독일군의 끔찍한 상황을 보고하자 히틀러는 독일군 사단을 나타내는 깃발로 가득 찬 지도만 내려다보았다 […] 전령은 나중에 ‘그때 나는 히틀러가 현실감각을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는 지도와 깃발로 이루어진 환상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 당시 기근(뱅골대기근)*을 경험한 기자 출신 저술가 칼리 차란 고시는 큰 재앙을 피할 수 있었던 조치들이 간과되거나 완전히 무시되었으며, 고위 관리들이 무지를 가장한 채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 요컨대 영국은 기근의 가능성을 무시했고 기근이 닥쳤을 때도 기근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뱅골대기근 = 1942~44년경 인도 동부지역에서 발생한 대기근으로, 약 300만명이 아사.

- 피터 버크, <무지의 역사>(이하 동일)

아무리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권력’이 실제로 마술처럼 적군을 모두 소탕하고, 기근을 없는 것처럼 만들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문제를 외면할 수 있었을 뿐이죠.

그리고 이런 ‘착오’는 결과적으로 현실의 문제를 훨씬 더 크게 키울 뿐이고, 죄없는 국민들을 자신의 이야기에 휘말려들어가게 만듭니다.

'포템킨 마을'과 관련된 다양한 전설들이 존재해왔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전설 중 일부는 과장되었지만 미리 시찰 사실을 알고 강변을 따라 윤택한 마을처럼 보이도록 꾸민 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포템킨 마을'은 보통 판자를 앞쪽에 세워 거리쪽에서 봤을 때는 호화로워보이지만 실상은 초라한 건물들을 일컫는 명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왼쪽) 필립 쿤은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링크)에서 18세기 건륭제 시절 '변발을 잘라 영혼을 훔치는 요술사'라는 소문을 고의로 부추겨 권력층에게 향하는 민중의 분노를 '요술사'들에게 쏟도록 했던 사건을 파헤칩니다. 희생양이 된 요술사들은 대체로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승려, 거지, 도사 등 주변부 인물, 약자들이었습니다. / 브리태니카백과사전(링크), 책과함께

2. 권력자는 또한 사람들이 어떤 사실을 ‘모르게’ 하거나 혹은 다른 방식의 이야기에 한눈팔게 해서 진실을 의도적으로 감출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의 무지였습니다. 노던 스타지는 “대중이 무지로 인해 모든 시대에 계몽된 자와 교활한 자의 노예 노릇을 해왔다”고 말하기도 했죠. 1930년대 일제 시대에는 대중이 여성 납치나 기근에 대한 이야기를 ‘모를 필요’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일제는 위안부 관련 소문을 유언비어로 찍어 이런 말을 전하는 이들을 잡아 가뒀다고 합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에 무지한가. 그리고 그에 따른 어떤 결과에 무지한가’ […] 이들(권력자)은 목표대상이 무지한 상태를 허용하고, 유지하고, 촉진하고, 이용하거나 심지어 요구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무엇을 모르게 하려고 하는가?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기회와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행동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

특히 가장 효과적인 무지의 기법은 ‘혐오 서사’를 이용하는 거였는데요.

어떤 집단을 맹렬하게 혐오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본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덜 갖게 하고 권력에 대한 불만을 잠재워 통치를 손쉽게 했던 것이죠.

단적으로, 배고픈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고 복지 제도를 마련하는 덴 막대한 돈이 들지만, 대신 외국인이나 특정 집단 사람들을 미워하게 하는 건(“너희가 가난한 이유는 외국인 노동자/요술사/마녀/유태인/빨갱이... 때문이야!”) 돈도 들지 않고 기존 권력 질서를 전혀 흩뜨리지 않는 그야말로 ‘가성비 전략’입니다.

【4.탈진실에 빠진 이들은 과연 행복한가? : 진정한 자기중심주의】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진실 여부와 관계 없이 자신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에는 매력이 있고, 심지어 거짓으로 드러나더라도 사람들은 차라리 도피하는 쪽을 택한다.

1. 하지만 어떤 시점에는 반드시 차가운 현실에 맞닥뜨리게 되고,

1. 그간 (제때 받아들이고 적절히 대처했으면 더 나은 결과를 낳을 수 있었을만한) 유용한 신호를 ‘적극적 무지’로 무시해왔기 때문에 그 결과는 훨씬 더 큰 재앙으로 닥쳐올 수 있다.

문제는, 위에서도 살폈듯 이런 탈진실의 상황에 빠진 사람에게 “그건 진실이 아냐!”라고 외치는 건 안타깝게도 별 효과가 없다는 점입니다. 애초에 이야기에 과몰입한 사람들에겐 진실따윈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이들을 단념하고 놔둘 수 밖에 없는 걸까요?

*

마지막으로 간단히 살펴볼 테어도어 아도르노의 <신극우주의의 양상>(1964)은 1960년대 독일에서 떠오르던 신극우주의자들에 대응하는 ‘현실적인 전략’을 이야기한 강연집인데요.

이 책에서 아도르노는 단지 이들을 자연재해적인 바보 취급하고, “먹이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방치하는 것은 적절한 대책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직접적인 대처가 필요하고, 또 가능할 수 있다는 거죠.

제 생각에는 이른바 쉬쉬하는 […] 침묵과 무시로 대응하는 전략은 단 한번도 그 효과가 입증된 적이 없습니다 [...] 극우주의를 처음부터 마치 자연재해처럼 바라보는, 마치 돌풍이나 기상재해인 양 예보를 하는 이런 사고 방식에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우리 자신을 차단해버리는 일종의 체념이 이미 들어가있습니다 […] 책임은 종국적으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테어도어 아도르노, <신극우주의의 양상>(이하 동일)

*

그렇다면 우리는 ‘탈진실’에 빠진 사람들 -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아도르노는 이 책에서 심리적인 ‘꿀팁’들을 제시하는데요. 그중에서도 저는 두 가지 해법에 주목했습니다.

1. 호구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 탈진실의 트릭을 낱낱이 밝히라

2. 진짜 이해관계를 환기시켜라 : ‘슈퍼맨 놀이’하는 사람

첫째, 누구도 ‘호구’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아도르노에 따르면 국가가 동원해온 프로파간다는 그 엄청난 파급력과 생명력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레퍼토리가 뻔합니다. 이 때문에 이런 트릭을 조목조목 분석해 이름을 붙이고, 구조화하고 계속 노출시키는 게 큰 도움이 된다는거죠. (마치 보이스피싱 등 신종사기 트릭을 자세하게 노출시키는 것을 통해 범죄를 예방할 수 있듯요.)

예를 들어, 이 책에서 거론된 트릭들은 ‘사실과 전혀 무관한 미친소리’5) 일단 계속 내뱉기, 마치 독일이나 특정 집단을 대표하는 듯한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치장한 성명문, 엉터리 설문조사의 활용 등입니다.

이런 기술이 비교적 수가 많지 않고 언제나 되풀이되는, 표준화할 수 있고 완전히 객관화할 수 있는 트릭들이라는 것은 제가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확신인데요 […] 아주 빈약하고 얄팍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바로 그 점에 힘입어 그 나름으로는 이런 운동들에서 특정한 프로파간다적 가치를 획득합니다.

[…] ”당신은 그때 누스바움 랍비가 모든 독일인들을 거세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걸 모른다고?” 말하자면 이런식의 완전히 꾸며낸 미친소리입니다[…] 통제하기 어렵지만 바로 이 통제 불가능성에 힘입어 이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특수한 방식의 권위를 부여하는 지식들로 허풍을 떠는 것입니다.

[…] 전문 용어를 동원하여 마치 그들이 어떤 공공기관에서 나왔거나 공공기관의 후원을 받고 있는 양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 극우지는 스스로를 ‘대학생 신문’이라 칭하는데 […] 그들은 ‘독일적’이라는 단어 또한 독점합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독일적이라고 부릅니다.

둘째로는, ‘진실’ 여부보다는 그로 인해 현실에 미칠 수 있는 ‘결과’라든지 현실의 이해관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슈퍼맨 놀이에 너무 심취해있기 때문에 위험해보인다고 할 때, “넌 슈퍼맨이 아니야”라고 꾸짖는 대신 “네가 슈퍼맨처럼 망토를 두르고 자신만만하게 지붕에서 뛰어내렸다가는 크게 다치게 될거야”라는 식으로요.

테어도어 아도르노의 1964년 강연을 정리한 책 <신극우주의의 양상> (왼쪽) 구독자 721만의 미국의 대표적인 젊은 보수 논객 벤 샤피로는 최근 미 보험사CEO 암살사건을 두고 “사악한 혁명적 좌파가 살인을 옹호한다!The EVIL Revolutionary Left Cheers Murder!(영상)”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을 올렸는데, 이 영상에는 2만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대부분의 댓글들은 '좌우 막론하고 이 사건에 환호하고 있다' '공화당 지지자들 역시 보험사엔 진절머리가 난다' 등 그를 비판하는 것들이었고 이런 맹렬한 반응 자체가 이슈가 되기도 했죠(링크). / 문학과지성사, 벤 샤피로 유튜브

또한 생각보다 사람들은 명백하게 현실의 이해관계가 문제가 되는 지점에서는 이야기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최근, 미국의 보험사CEO 총격 사건과 관련해 드물게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의 반응이 유사했다고 합니다. 지지하는 당이 어디든 간에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무지막지한 미국의 보험, 의료비 문제를 피부로 알고 있으니까요.

* 그들 자신에게도 명백해보이는 이해관계가 문제가 되는 지점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루스벨트 정부의 철천지 원수였습니다. 하지만 세입자 보호나 의료비 인하와 같이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제도가 등장하자 반루스벨트주의는 즉시 끝이 났고, 그들은 비교적 합리적으로 행동했습니다.

* 정말로 가망이 있어보이는 유일한 조치는 극우주의의 잠재적 추종자들에게 그들이 책임져야 할 결과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 이런 정치는 그 정치를 따르는 추종자들까지 모조리 재앙으로 몰고갈 수밖에 없고 그 정치에 이런 재앙이 처음부터 계산되어 들어가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 우리가 이런 운동에 진지하게 맞서고자 한다면 프로파간다가 끌어들이려하는 자들의 철저한 이해관계를 환기시켜야 합니다.

마지막 대목은 특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사실입니다만. 실제로, 탄압의 대상이 되는 이들 뿐 아니라 대부분의 추종자들 역시 현실에서 위안을 받지 못합니다.

전쟁 지지자들은 전장에 나가서 목숨을 잃을 수 있었기에 실제로 행복했을까요? 트럼프 지지자 백인들은 그의 당선 이후 실제로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복지를 ‘효율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은 실제로 더 나은 삶을 살았을까요? 노조를 몰아내야 한다는 이들은 정부의 노조 탄압으로 인해 실제로 더 나은 조건에서 노동을 했을까요? 인종차별자들은 극우주의 정치인의 당선으로 실제로 윤택한 일자리를 얻고 더 행복해졌을까요? ...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그들 역시 현실의 초라한 희생자가 되죠. 권력자들이 부여한 약간의 매력적인 이야기 조각을 나눠가진 채요.

【5.맺음말】

편지의 초입에서도 간단히 말했습니다만, 사실은 ‘가짜 이야기’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먼옛날부터 사람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장난을 치기도 했고, 상상을 하면서 용기를 얻기도 하고 척박한 현실을 잠깐 잊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짜 이야기’는 그것이 애초에 ‘가짜’건 ‘진짜’건 상관없이 흥미로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것이라 거기에 대고 “그건 진짜가 아냐!”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대항할 수가 없습니다.

*

‘가짜 이야기’가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이야기가 우리의 현실을 잡아먹고 우리가 삶의 주인이 아닌 ‘희생자’가 되게 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탈진실 서사는 꿀잼이나 장난, 용기 그 자체보다는, 우리를 이용하려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진부한 방식으로 조작되고 동원됩니다.

이때 만약 우리가 그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고 - 차라리 제대로 된 자기중심주의를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조금은 덜 진부한 방식으로 탈진실 시대를 격파해 낼 새로운 에너지와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레온 페스팅거 외, 김승진 옮김, 『예언이 끝났을 때』, 이후, 2020.

-1956년에 처음 출간되어 출간 뒤 약 70년이 흘렀지만 오늘날 읽어도 전혀 낯설지 않은, 오늘날에도 이런저런 생각거리를 주는 책입니다. 굉장히 파격적이고 흥미로운 내용임에도 직접 읽어보면 내용이나 사건의 진행 과정 등이 의외로 굉장히 건조하게 적혀있는데요. 인지부조화 상태는, 현실과 자신의 생각에 균열을 미약하게 감지하는 상황이고 이 '균열'의 상태는 개인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지부조화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데요. 인지부조화를 없애는 방법엔 크게 두 가지가 있을텐데, 사실에 주목하기 vs 사실을 외면하기이고 책 속의 '구도자'들은 후자를 택한거죠.

개인적으로 저는 이 책에서 같은 조직에 몸 담았음에도 잠시 모임을 떠나있는 것만으로도 집단에서 빠져나오는 게 훨씬 더 쉬웠다는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이어, 최근 한 해외 뉴스레터에서 어떤 저널리스트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굳이 한참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종이신문을 읽기 시작했다는 글을 읽었던 게 떠오르기도 했는데요. 당시엔 별 신박한 이유도 다있군...하고 대충 넘겼는데,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을 굴려가다보니 - 사실 인쇄물(오프라인 감상)과 온라인 감상 간에는 수많은 다른 차이들이 있겠지만, 큰 차이 중 하나는 '떼로 보느냐(?)' '혼자서 보느냐'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라인에선 어떤 글이나 영상을 보든 타인의 반응(댓글, 인용 코멘트 등)에 '곧장' 휩쓸리기 쉬운 반면, 같은 글이라도 인쇄물로 볼 때는 그냥 한참동안 제 멋대로 생각을 구체적으로 키워갈 수 있는거죠. 물론 여기엔 장단점이 있겠습니다만, 저는 일단은 제 생각을 제멋대로 키워보는 쪽을 좋아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피터 버크, 이정민 옮김, 『무지의 역사』, 한국경제신문, 2024.

-본문에서 소개했듯 '무지'에 초점을 맞춘 피터 버크의 책입니다. 책의 부제는 '알지 못하거나 알기를 거부해온 격동의 인류사'입니다. 특히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메시지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권력이 없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지식이 없다"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는 어떤 기업조직 등에서 현장 직원들은 어떤 위험이 존재하는지, 상황이 어떤지 구체적으로 가장 먼저 체감하게 되지만 이런 의견을 상부에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받아들이지 않은 걸 넘어 억압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신호에 주목하고 조직이 제때 대처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연하게도 지식(무지)의 문제일 뿐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테어도어 아도르노, 이경진 옮김, 『신극우주의의 양상』, 문학과지성사, 2020.

-아도르노가 1960년대에 독일에서 발흥하기 시작했던 신극우주의에 대해 강연한 짧은 강연문을 담은 책입니다. 굉장히 짧으면서도 명쾌하게 쓰여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포인트는, 그가 극우주의자들의 헛소리에 '먹금(먹이주기 금지=헛소리에 '먹이(관심)'를 주지 말고 무시하라는 뜻의 인터넷 용어)'은 답이 아니라고도 하면서 - 그 해법으론, 이야기의 '정치적 내용'에 집중하기보다는 탈진실(극우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상황을 메타적으로 직시하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점입니다.

최은창, 『가짜뉴스의 고고학』, 동아시아, 2020.

-오늘 레터에서 직접 길게 다루진 않았지만, 레터를 준비하면서 도움이 되었던 책입니다. 먼 과거로부터 '가짜뉴스(썰, 풍문?)'의 역사를 오늘날까지 짚어가는 책입니다. 사실 19세기 이전에는 신문이 (특히 대중들이 보는 저가 신문의 경우) '최신업데이트된 엄격한 정보뭉치'라기보다는 '싸고 재미난 읽을거리 뭉치'의 성격이 강했고, 이 때문에 오늘날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부정확한 썰이나 픽션 등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프로파간다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정말로 그냥 '시간때우기' 용이었기 때문에, 무해하고 허무맹랑한 사건기사(hoax) 아래 '이것은 모두 꾸며낸 이야기입니다'라고 적혀있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상 fiction에 가깝다고 할 만하겠네요.

"진실이 별다른 재미를 주지 못한다는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1센트짜리 신문을 읽던 독자들은 엄밀한 수학 공식이나 건조한 논문같은 글을 원하지는 않았다[…]페니페이퍼는 저널리즘의 사명감은 신경쓰지 않았다[…]줄거리를 읽기 편하게 윤색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을 뽑고, 부족한 정보 빈틈을 채워넣는 작업이 진행되었다."(최은창, <가짜뉴스의 고고학>)

여튼 요는, 본문에서도 짧게 언급했습니다만 - 오늘날의 가짜뉴스는 그것이 '가짜'라는 점보다도 어쩌면 그 안에 의도된 악의적인 목적이 핵심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 악의적 목적이 아니고 그냥 꿀잼목적이었다면 hoax들의 사례처럼, 그냥 마지막에 '이것은 다 거짓말이었습니다'라고 쓰면 되겠죠.)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왜 가짜뉴스가 아닌가?

독서시간: 약 3분 / 글자수: 약 1200자

🖍글 속 한 문장

“국정원의 선관위 서버 조사 결과 북한·중국 해킹 및 선거결과 조작 가능!” 얼마 전 모 정당이 광화문 한복판 세종대로 사거리에 내건 현수막이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 근거 없는 선거부정 주장은 사회통합을 해치고 민주주의 근간을 흔든다. 틈만 나면 ‘가짜뉴스’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윤석열 대통령은 왜 이런 주장에 잠잠할까. 대통령의 가짜뉴스 셈법대로라면 당장 압수수색과 구속, 소환조사에 들어가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불리한 이야기를 ‘가짜뉴스’라며 오히려 역으로 공격하는 게 윤석열 정부의 전형적 패턴”이기 때문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2023년 방한했던 뉴욕타임스 아서 슐츠버거 회장은 "가짜뉴스는 굉장히 음흉한 표현"이라며 "역사를 돌이켜보면 '가짜뉴스'라는 표현은 나치 독일, 스탈린 소련 등 인류 역사의 끔찍한 순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용어들은 독재자들이 독립적인 언론을 제거하고 나라를 통제하는 데 쓰였다"고 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짜뉴스'를 없애야한다고 호쾌하게 말하고 싶지만, 실제로 그간 윤석열 정부를 비롯해 지금까지 많은 권력자들은 '가짜뉴스'라는 단어를 자신의 의견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해왔습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은 임기 초반부터 '가짜뉴스' 대응을 부르짖으며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를 한 언론들을 고발하고 '가짜뉴스 대응방안'을 대대적으로 발표했죠.(링크)

메타, 가짜뉴스 관리 손 놓는다?

영문 / Poynter

🖍글 속 한 문장

친애하는 저커버그 씨,

9년 전, 우리는 Facebook의 허위 정보로 인해 발생하는 현실 세계의 피해에 대해 편지를 썼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Meta는 수백만 명의 사용자를 사기와 음모론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실 확인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이번주에, 당신은 "너무 많은 검열"에 대한 우려로 인해 미국에서 그 프로그램을 종료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결정은 온라인에서 정확한 정보를 홍보하는 데 있어 거의 10년간의 진전을 무산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메타는 지난 7일 SNS에서 가짜뉴스를 판별하고 사실관계를 규명하는 ‘제3자 팩트체크’ 기능과 혐오표현 규제정책도 폐지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SNS에서 자체 콘텐츠 검열 기능을 없애야 한다’던 트럼프 당선인 측 요구에 부응한 조치로 해석되고 있는데요. 이에 전세계의 팩트체커들이 저커버그에게 보낸 공개 서한입니다.

오늘 레터에서는 구체적인 가짜뉴스들의 사례보다는 서사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는데요. 합의된 명백한 사실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 및 호도는 플랫폼에서 최대한 방지해야 할 의무가 있을 것입니다. 일단, 기사(편지)의 본문에도 언급되었듯 오늘날 미디어 생태계에선 진실 여부보다도 자극적인 주장이 더 주목을 얻고 경제적인 이득을 얻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플랫폼이 가짜뉴스를 조장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황제에게 그 ‘소문’은 유용한 도구였다

독서시간: 약 3분 / 글자수: 약 1700자

🖍글 속 한 문장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건륭제의 반응이다. 황제는 요술 소동이 터무니없는 미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요술사가 변발을 자른다’는 부분에서 만주족에 대한 한족의 모반의 상징을 읽어낸 황제는 요술사 소탕령과 함께 한족 관료들에 대한 통제를 한층 강화했다. 풍속 문제로 처리해도 충분했을 요술 소동을 정치 범죄로 ‘격상’시킨 것이다. ‘권력은 정치 범죄가 발생했을 경우에 가장 잘 행사될 수 있었다.’

결국, 건륭제에게 영혼을 훔치는 사건의 실재 여부는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지금 우리가 남의 나라 옛날 이야기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본문의 챕터3에서 짧게 소개한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의 서평입니다. 18세기 청나라 건륭제의 시절 여기저기서 '변발을 잘라 영혼을 훔치는 요술사'들이 있다는 루머가 돌았고, 주로 떠돌이 등이 '마녀사냥'으로 몰려 집단 린치를 당했다고 합니다.

건륭제는 그것이 단지 뜬소문, 해프닝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지만 오히려 이를 '정치범죄'로 격상시켜 대대적인 요술사 소탕령을 내렸다고 하죠. 이를 통해 국가에 대한 반발을 잠재우고 외곽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실상 어떤 사회적 약자나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두드러질 때, 그 이면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음모론은 면죄부가 되었다

독서시간: 약 8분 / 글자수: 약 3900자

🖍글 속 한 문장

“선관위는 헌법기관이고, 사법부 관계자들이 위원으로 있어 영장에 의한 압수수색이나 강제수사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극우 유튜브 채널의 전형적인 ‘부정선거 음모론’이지만, 이번엔 발화자가 달랐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2월 12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을 추동한 배경에 이 음모론이 있었음을 실토했다.[...] 불통과 실정으로 지난 총선에서 참패한 대통령은 부정선거 음모론을 통해 스스로 면죄부를 주고, 성찰 없는 위안을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음모론이 어떻게 민주사회를 극단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단적인 예로 역사책에 기록될지 모른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레터의 본문에서는 이 부분을 다루지 못했지만, 음모론이라든지 사람들에게 선호되는 탈진실 서사의 특징에는 한 가지가 더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서사의 주인공인 '나'의 실책은 모두 다 면제해주고, 어떤 문제가 있는 경우 나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 위치시킬 뿐이라는 것이죠.

그런 종류의 서사에서는 어떠한 자신의 실책에 대한 반성, 그리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고 상황을 더낫게 만들려는 노력도 불가능합니다.

👥지난 회차의 반응

지난 회차(‘‘증오범죄’와 유머 : 증오는 결핍(-)이다’)에 대한 연구자님들의 반응을 모아 소개합니다. 편지로 다양한 의견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 버튼을 누르면 연구자님들의 반응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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