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은 한국인 최초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습니다.” 2020년 1월1일 당시 유남석 헌법재판소장이 발표한 신년사의 한 구절이다. 유 헌재소장은 2019년 한 해 동안 한국이 이룬 여러 성취들 가운데 우리 경제가 3년 연속으로 무역 1조달러를 달성한 점과 더불어 봉 감독이 만든 영화 ‘기생충’이 프랑스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점을 콕 찍어 언급했다. 봉 감독의 수상은 많은 한국인이 반긴 소식이었으나, 헌재소장 신년사에 특정 영화감독 이름이 등장한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앞에 ‘케이(K)-’라는 접두어가 붙는 수많은 한류 콘텐츠 중에서 헌재소장이 영화를 꼽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96년 10월4일 헌재는 흔히 ‘가위질’이라고 불리던 영화 사전심의제를 위헌으로 결정했다. 영화 개봉 이전에 검열관들이 먼저 영화 필름을 돌려 보고 문제가 될 만한 장면을 싹둑싹둑 자르는 제도는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 위헌이란 것이다. 이로써 국내 영화계는 검열이란 오랜 족쇄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작의 시대를 맞았다. 봉 감독의 칸영화제 제패 직후 최광희 영화평론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 영화의 질적 도약은 헌재가 검열에 위헌 결정을 내린 1996년부터 본격화되었다”며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누리면서 소재의 영역도 넓어져 젊은 재능들이 충무로로 쏟아져 들어왔고, 봉 감독도 이때 유입됐다”고 말했다. 헌재 입장에선 한국 영화의 대성공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예술에서 표현의 자유는 과연 절대적 가치일까. 영화 ‘청년경찰’(2017)을 둘러싼 법정 공방은 ‘어디까지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가’라는 근본적 문제를 제기한다. 560만 관객을 모은 ‘청년경찰’은 개봉 당시부터 국내 중국 동포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중국 동포들이 많이 사는 서울 어느 동네를 심각한 우범 지대인 것처럼 묘사했기 때문이다. 중국 동포 60여명은 “표현의 자유 한계를 넘어선 인종차별적 혐오 표현물”이라며 영화 제작사를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1심은 “표현의 자유”라며 제작진 손을 들어줬다. 2심의 판단은 달랐다. 2020년 3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부는 “제작사가 중국 동포들에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라”는 내용의 화해 권고 결정을 내렸다. 양측 모두 이를 받아들여 화해가 성립했다.
당시 ‘청년경찰’ 사건 항소심 재판부 소속으로 화해 결정을 이끌어낸 법관이 마은혁(61) 서울서부지법 부장판사다. 헌재의 국회 몫 재판관 3자리가 공석인 가운데 최근 더불어민주당은 마 부장판사를 재판관 후보자로 추천하며 ‘청년경찰’ 사건을 여러 이유 중 하나로 들었다. 마 후보자에 대해 “중국 동포 등 소수 집단에 대한 혐오 표현에 대하여 경종을 울렸다”고 후한 점수를 줬다.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게 하는 헌법재판을 수행할 적임자”라는 극찬도 했다.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헌재의 책무라면 표현의 자유로 인해 상처 받은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도 헌재의 의무라고 할 것이다. 마 후보자가 재판관이 된다면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둘 것인지 궁금해진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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