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산학일체'로 앞서가는데…"韓, 반도체법 하나 제때 처리 못해"

2025-01-02

29개 vs 0개.

연간 연구비 규모가 10억 달러를 넘어선 미국과 한국 대학의 숫자다. 미국은 2023년 기준 연간 연구비 지출이 10억 달러(약 1조 4000억 원)를 넘어선 대학이 29곳으로 이들 대학의 총연구비 지출액은 약 55조 원에 이른다. 반면 한국은 연구비 규모가 가장 큰 서울대조차 10억 달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국의 고등교육 전체 예산은 국공립 운영비, 교직원 인건비, 대학생 학자금 지원 비용 등을 포함해도 15조 원 수준에 불과하다. 김재구 명지대 교수는 “미 조지아공대의 경우 의과대학이 없음에도 연간 연구비 규모가 12억 달러를 넘어 서울대 연구비의 약 3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주정부의 뒷받침 아래 대학의 혁신 기업화 현상은 갈수록 가속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주요 국가들이 첨단산업 경쟁력 확보에 사활을 걸면서 연구의 산실인 대학이 글로벌 기업과 손잡고 막대한 연구비를 쏟아붓는 ‘산학일체’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산학일체는커녕 주요 기업의 핵심 인재 확보조차 어려운 게 현실이다. 미국 반도체협회가 2024년 5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반도체 설계 엔지니어의 전세계 점유율은 2%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일본과 유럽의 절반 수준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2031년 국내 반도체 인력은 무려 5만 6000명가량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2.0 시대’를 맞아 인재 육성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중론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최근 언론 인터뷰를 통해 "1% 인재를 데려가겠다”며 H-1B 등 이민 제도를 손보겠다고 공언했다. H-1B은 과학·기술·공학·수학 고숙련 전문직 외국인에게 최대 6년 체류를 허가하는 취업 비자다.

업계에서는 갈수록 심화하는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인력 양성을 위한 인프라 확충 및 규제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미국에서 활발하게 운영 중인 ‘기업대학’ 모델 도입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은 4년제 대학생의 중퇴 비율이 약 40%에 이른다. 이들은 퇴교 후 직무 교육에 특화된 애플 대학(Apple University), 구글 대학(Google University), 사스 인스티튜트(SAS Institute), 테슬라 인스티튜트(Tesla Insitute) 등에 대부분 입학한다. 인프라 시스템이 기존 대학보다 고도화된 것은 물론 학비가 거의 들지 않고 무엇보다 취업 연계가 가능해 나날이 수강생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 정치권의 지지부진한 논의 탓에 기업이 사내 대학원을 만들 수 있는 ‘첨단산업 인재혁신 특별법’이 올해야 시행됐다.

정치권이 국가 책략 관점에서 과감하게 반도체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제언도 있다. 국민경제자문회의는 지난해 8월 산업연구원에 의뢰해 작성한 ‘주요 전략 산업의 핵심역량 강화방안’ 보고서에서 직접 보조금을 지급하고 전략산업비상기금을 설치해 공격적인 예산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인재에게는 학비를 면제하고 취업 이후 주택청약과 소득세 면제 같은 특례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동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외부에서) 반도체와 AI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잔치만 하고 있을 뿐 업계 평균 연봉으로 따지면 그렇게 높지 않은 편”이라며 “보수를 확실히 더 줄 수 있게 해 좋은 인재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매커니즘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근본적으로는 정부와 국회·산업계가 2인 3각 달리기처럼 긴밀한 협업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조언이 제기된다. 국회가 지금처럼 기업의 발목만 잡고 있는 형국에서는 글로벌 경쟁에서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22대 국회 첫 정기국회의 법안 심사를 앞두고 재계가 건의한 경제 분야 입법 과제 23개 중 여야 모두가 발의했던 12개 무쟁점 법안 대부분은 통과가 끝내 무산됐다. 지난해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 주요 무쟁점 법안들은 △반도체 특별법 △첨단전략산업 기금법 △형법 개정안(국가 핵심 기술 부정 유출 시 처벌 강화) △전력망 확충 특별법 △외국인 근로자 고용법 개정안 등이다. 반도체법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는 자조까지 흘러나온다. 이영달 뉴욕시립대 방문교수는 “첨단산업일수록 정부와 국회·기업·대학이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성장을 이어갈 수 있다”며 “미국이 첨단산업에서 지위가 더욱 공고해진 것은 기업 스스로의 노력도 있지만 무엇보다 행정부와 입법부를 아우르는 국가 리더십이 발휘됐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