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 아닌 앎은 얼마나 될까?

2024-09-25

“사람은 그가 하는 대답이 아닌 질문을 통해 판단하라.” 이 말을 볼테르가 했다는 사실을 일주일 전에 알았다. 볼테르를 읽어본 적이 없는 나의 무지 때문이다. 당혹스러운 것은, 오래전 나는 글을 통해서 ‘중요한 것은 대답이 아닌 질문’이라고 써왔다. 거기에 각주는 없었다.

내게 묻는 사람들의 다양한 질문을 통해서 느꼈던 부분을 썼던 것이기 때문이다.

질문에는 그 사람의 깊이가 녹아 있다. 대답은 얼렁뚱땅할 수 있어도 질문은 그 사람의 현재를 정확히 표현해주기 때문이다. 나도 느낀 것을 볼테르가 먼저 말했던 것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적잖은 사람들이 공감할 내용을 어느 시점 누가 독점할 수 있을 것인가?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했던 말의 소시민적 현실판인 셈이다. 그렇다고 플라톤이 모든 것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그 역시 탈레스를 비롯한 수많은 앞선 세대의 발자취를 따랐다.

우리가 가진 착각 중엔 고대인이란 이름의 앞선 사람들에 대한 잠재적 무시가 자리하고 있다. 혜화동에 모인 전투적 페미니스트를 보면서 앞선 세대 여성들의 무기력함을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김일엽, 나혜석 그리고 허정숙의 말과 삶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알맹이 없는 얘기인지 확인하게 된다. 이게 다가 아니다.

한반도에서 고인돌을 만들고 있었던 시기 그리스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혜화동에 모여 외치는 목소리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애기 하나 낳기보다는 삼세번 싸움터에 나가는 것을 난 택하겠어요.” 기원전 431년 에우리피데스가 쓴 <메데이아>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그리스 이전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남긴 당시 삶의 기록을 보면 그들이 오늘 우리와 무엇이 다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고대인들은 사냥에 나서면서 동시에 자신이 맹수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한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다. 그들의 처절한 생존노력이 없었다면 오늘 인류가 지구상 주인이 될 수 있었을까?

놀라운 사실은 이것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이미 기원전에 이뤄졌다는 것이다. 처음 석기를 만들고 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부터 영의 개념을 찾아내 세상을 바꾼 것도 앞선 사람들이 우리에게 남긴 귀한 자산이다. 우리는 그 거대한 발걸음에 미세한 흔적 하나를 더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분야의 창작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

상상력조차도 주어진 것이 전제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선천적 시각장애인의 꿈이 청각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내 앎의 홀로됨은 어디에 있을까?

셰익스피어 시대엔 표절 개념이 없었다. 그가 남긴 위대한 흔적들이 당대 극작가들의 협업에 가까운 산물이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햄릿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화살에 맞은 사슴은 울게 내버려 둬라.(Let the stricken deer go weep.)”

감성의 깊이가 놀랍다. 표절 아닌 내 앎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장상록 <완주군농업기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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