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 불법 계엄 이후 1년이 흘렀다. 또 계엄을 선포하면 어떡하나, 이후엔 법망을 빠져나가 내란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으면 어쩌나 또 탄핵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보낸 시간이었다. 아직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다행으로 대통령은 탄핵되었고 계엄 가담자들은 하나둘 구속되었다. 재판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여전히 ‘혹시’의 연장선에 있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차근차근 하나씩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눈에 띄게 거슬리는 문구들이 불법 계엄에 가담자들의 입을 통해 언론에 보도되었다. 정치인 체포, 구금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키려 했던 당사자 전 방첩사령관 여인형, 그는 재판 증언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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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 편입니다."
이에 질세라 역사 선생에서 극우 유투버로 전향한 전한길은 자신이 윤석열에게 받은 편지를 소개했다. 윤석열은 감옥에서도 하나님 팔이에 여념이 없다. 손현보 목사도 <열두 번의 음성과 열세 번의 환상>이라는 제목의 옥중서신을 집필해 화제다. 법을 어겨 재판받고 감옥에 가 있음에도 본인은 마치 대단한 고난을 겪고 있는 것마냥 자신을 높여, 사도 바울로 빙의해 음성과 환상을 들었다며 책을 냈다(성경에서 바울은 감옥이 무너져 밖으로 나갈 수 있음에도 자신을 지키던 간수를 위해 감옥에서 벗어나지 않을 만큼 의리가 있었는데, 손현보는 어떤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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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 하나님을 들먹이는 권력은 무엇 때문에 생겨났을까?
이는 새로운 현상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 팔이는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한국 현대 정치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특징 중 하나는, 권력자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종교적 언어, 특히 기독교적 언어를 자기 정당화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70여 년의 역사가 보여준다.
대부분의 범죄자는 자신의 범죄 혐의나 법적 책임을 둘러싼 압박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 편이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신다”, “내가 박해받고 있다”와 같은 언어를 반복한다. 이러한 발언은 단순한 종교적 관습을 넘어 한국 정치·종교 문화가 만들어낸 고유한 자기성화(self-sanctification) 메커니즘을 드러낸다.
신성한 자기 정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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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혹은 법적 책임을 요구받는 인물이 “나는 하나님 편이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뭘까. 바로, 도덕적 우위를 주장하기 위함이다. 심리학에서는 도덕적 정당화(moral justification)라 불린다. 알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가 말한 ‘Self-exoneration’ 즉 ‘자기 면책’의 대표적 방식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신이나 초월자와 같은 더 높은 도덕적 질서와 연결함으로써 책임을 피하거나 약화하는 장치다. 우리네 역사에서 이러한 기제는 늘 강하게 작동해 왔다. 불교나 천도교나 원불교 등 타 종교가 아닌 기독교의 신을 들먹이는 이유는, 기독교 자체가 식민지, 전쟁, 정통성 붕괴라는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신앙이 곧 도덕적 우월성이라는 인식을 우리 사회에 깊게 새겨 놨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신사참배 사건(1938년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 결정)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국가 의례'라고 주장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신토(神道)에 기반한 종교 행위였다. 그럼에도 한국 교회의 다수 지도자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닌 예배와는 상관없는 국가 충성 의식이다,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논리로 이를 승인했다. 반면 신사참배에 끝까지 저항한 기독교인들은 투옥이 되고 그 안에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지켰다. 심지어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신사참배는 그르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문제는 해방 이후였다. 신사참배를 승인했던 지도자들이 다시 교권을 장악한다. 믿음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저항했던 신앙인들은 교단 밖으로 밀려났다. 일제에 머리를 조아리며 신사참배를 했던 이들은, 자신도 목숨 걸고 교회를 지켰고,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며 자신을 위안했다. 한국 기독교의 정통성이 완전히 뒤바뀐 사건이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들이 제도적으로 ‘정통’이 되었고, 정작 신앙을 지킨 이들은 ‘문제의 인물’ 또는 ‘불편한 존재’가 되었다. 이 경험은 한국 기독교 내부에 깊은 심리적 균열을 남겼다.
이 사건 이후, 많은 신자는 기존 교회가 더 이상 진정한 신앙의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정통 교회는 이미 타락했으며 진짜 신앙인은 제도 바깥에 있다, 새로운 지도자와 새로운 계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 심리가 이후 한국 종교 문화의 중요한 토양이 된다. 왜 한국에 사이비 이단이 넘쳐나는지 묻는다면 신사참배 이후의 기독교 대응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교회의 도덕적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는 새로운 지도자, 새로운 계시, 새로운 공동체를 찾으려는 열망이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 무수한 개교회와 자칭 예언자 그리고 자신을 ‘새 시대의 지도자’라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난립하는 종교적 토양이 되었다.
'하나님 사람'이라는 말이 갖는 기묘한 힘

1973년,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유신을 정당화한 김준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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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이후, 우리 사회에서 특히 기독교 문화권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 자체는 정치적 혹은 도덕적 정당성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God’s man)’은 단순한 신앙적 표현을 넘어 도덕적 면책권의 의미로 작동했다는 뜻이다.
군부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이 프레임은 더 강력해졌다. 이승만은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로 묘사했고, 박정희 시대에는 일부 목회자들이 군부독재를 “하나님의 뜻”이라 설교했다. 전두환은 쿠데타와 광주 학살 뒤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대통령이 되었다”라고 말했으며, 이를 지지한 목회자들은 “전두환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는 극단적 언어를 사용했다. 이 전통은 그대로 이어져 오늘날 극우 개신교 정치세력은 자신을 “하나님의 군대”로 부르며 정치적 투쟁을 신성한 전쟁으로 포장하고 있다. 기독교인은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기독교 지도자는 윤리적으로 우월하다, 그리하여 신앙의 기독교적 발언은 정치적, 법적 비판을 초월한다는 영적 우월 프레임이 형성된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법적 책임을 지는 순간에도 자신을 의인의 위치에 둔 채 자신을 “하나님 편”에 세우는 것이 가능해진다. 심지어 감옥에 가서도 자신을 피해자이자 선지자처럼 묘사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겸손한 태도가 아니라, 죄를 회피하기 위해 종교적 언어를 이용하는 자기성화(自己聖化)의 한 형태이다. 하나님을 말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 신앙을 말하지만 회개는 없는, 권력의 기술로 변질된 신앙의 그림자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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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습니다."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내란 재판정에서 쉴 새 없이 들리는 말이다. 거짓말로 회피했다가 증거가 제시되면 인정하는 과정의 반복. 위증과 회피가 난무하는 법정의 재판 과정을 보노라면, 또 그러한 말을 많이 하는 이들이 자신들은 하나님 편이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말을 듣노라면,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아멘"을 외치는 방청객을 보노라면,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기독교는 이미 기독교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 공동체라면, 잘못했을 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회개다. 성경이 강조하는 회개는 단순히 감정적 슬픔이 아니라,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며 관계를 회복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종교 지도자 상당수는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신의 이름을 먼저 꺼내며, 비판을 '박해'로 해석하고, 처벌을 '의로운 고난'으로 포장한다. 그 결과, 죄는 책임으로 이어지지 않고, 책임 회피는 신앙 언어로 덮이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오히려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기형적 구조가 반복된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종교적 과잉 표현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치와 종교가 함께 만들어낸 도덕적 타락의 구조다. 기독교가 신사참배 이후 정통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제도적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던 역사, 전쟁과 분단·독재를 거치며 종교와 권력이 결탁했던 구조, 그리고 도덕적 책임보다 자기 정당화에 익숙해진 정치 문화가 결합하면서 “신의 이름을 동원한 자기성화”가 반복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언어가 아니라 권력의 언어이며, 회개의 부재가 만들어낸 비극적 패턴이다. 그리고 이 패턴은 지금도 여전히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혼란과 종교적 왜곡을 키우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윤석열과 계엄 가담자들이 보여준 언어는 도덕적 면허(Moral Licensing)다. 사람은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느끼면, 그 도덕성을 근거로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죄책감을 덜 느끼게 된다. 지금은 종교적 면허가 더해졌다.
나는 하나님 편이다 → 그러므로 나는 옳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악이다 → 내 처벌은 박해이며 나는 의로운 고난을 받고 있다.
끊을 수 없는 셀프용서의 뫼비우스띠가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중이다. 그리고 윤석열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과 이명박, 그리고 극우 개신교 정치세력과 함께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신다는 언어를 사용하며 신의 이름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다.
신앙의 출발은 언제나 회개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돌아서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그러나 우리네 정치, 종교 지도자 상당수는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신의 이름을 먼저 꺼낸다. 신의 이름을 부르면 자신은 의인이 되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악이 되기 때문이다. 처벌받을 때도 박해로 프레임을 바꿀 수 있다. 책임은 흐려지고, 자신은 영웅이 된다. 종교적 언어의 부패다. 단순한 종교적 과잉 표현이 아니라, 권력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신의 이름을 도용하는 권력의 기술이다.
극우 개신교는 자신들이 믿는 신을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한 이들에게 내던졌다. 이 패턴은 과거에도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치와 종교에 도덕적 균열이 대단히 깊다는 증거다. 만약, 이 균열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앞으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입은 권력'이 저지르는 또 다른 비극을 맞게 될 수밖에 없다.
편집 : 금성무스케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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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 B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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