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대 후반 일본 경제는 버블 붕괴 이후 장기 불황과 초저금리, 엔저(엔화 가치 하락)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가계 살림을 책임지던 일본 주부들은 남편 월급과 예금이자로는 생활이 버거워지자 과감한 선택을 했다. 사실상 제로금리였던 일본 은행에서 엔화를 빌려 뉴질랜드·호주·튀르키예 등 고금리 국가의 채권이나 통화 상품에 투자해 고수익을 거뒀다. 일본 개인투자자의 대명사가 된 ‘와타나베 부인(Mrs. Watanabe)’의 탄생이다. 이후 그들은 금리 차를 이용한 엔캐리 트레이드의 핵심 세력이 됐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 외환시장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한국에서는 ‘서학개미’가 와타나베 부인의 뒤를 잇는 모습이다. 수년간 침체된 ‘국장(코스피)의 배신’ 속에 저금리, 미국 기술주 랠리, 투자 플랫폼 고도화가 ‘동학개미’를 미국 증시로 대거 이동시켰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한국 투자자의 미국 주식 보유액은 2019년 말 12조 원에서 현재 236조 원으로 6년 만에 무려 20배 넘게 불어났다. 해외 주식 순매수 역시 지난해 15조 원에서 올해 42조 원까지 늘었다. 취업난과 치솟는 부동산 가격에 위기감을 느낀 2030세대를 중심으로 엔비디아·테슬라 등 빅테크 주식뿐 아니라 3배 레버리지 상품, 비트코인 관련주 등까지 빠르게 확산된 결과다.
돈이 수익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할까. 서학개미의 폭발적 증가는 예상치 못한 새로운 변수를 만들어냈다. 원·달러 환율 급등의 배경 중 하나로 해외 주식 매수가 지목된 것이다. 올해 들어 외국인이 한국 주식을 대거 사들이고 기업이 해외에서 벌어 들인 수익도 상당 규모 국내로 들어오지만 환율은 내려가지 않고 있다. 2년 전 달러당 1300원대였던 환율이 요즘은 1500원 선마저 쉽사리 위협한다. 바야흐로 달러 약세 국면에서도 원화 강세로 돌아서지 않는 이상 현상이 지속되는 ‘뉴노멀’이 펼쳐지고 있다. 외환 당국으로서는 환율을 안정시키려 해도 해외 주식을 사기 위한 거액의 원화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면 난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금이 국경을 넘어 이익을 쫓는 게 자본주의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면서 산업뿐 아니라 ‘돈도 국적을 가진다’는 인식도 확산 중이다. 한국은 미국 제조업 부흥을 위해 앞으로 10년에 걸쳐 3500억 달러를 투자해야 한다.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약 4300억 달러)을 고려해 연 200억 달러 상한을 설정했지만 이 역시 원화 유출을 통한 환율 상승 압박 요인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서학개미 투자금까지 더해진다면 환율 관리는 더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최근 해외 주식 양도차익에 부과되는 세율 22%(250만 원 초과분)를 조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수면 위에 오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 세제를 건드릴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정부가 환율 안정을 위해 노후 안전판인 국민연금까지 활용할 정도로 다급해진 상황을 보면 환율이 임계치를 넘으면 세제 개편 카드가 테이블 위로 올라와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최근 외환 당국이 이례적으로 증권사들을 소집해 서학개미의 해외 주식 결제 수요 확대에 따른 환율 변동 실태 파악에 나선 것 또한 예사롭지 않다.
해외 투자로 벌어들인 돈이 국내로 유입되면 이는 분명 국부 창출이다. 개인 투자의 다변화 역시 장려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 와타나베 부인이 글로벌 금융시장에 파장을 일으킨 것처럼 서학개미의 투자가 환율을 좌우하는 현상이 고착된다면 이 문제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 무엇보다 일본과 달리 한국 통화는 기축통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우리 정부가 취할 해법은 ‘해외 투자 억제’가 아닌 ‘주식 리쇼어링’이다. 값싼 인건비를 쫓아 해외로 떠난 기업을 세제혜택과 인센티브로 다시 자국으로 회귀시키는 것처럼 서학개미를 불러들일 정책이 우선돼야 한다. 한국이 강점을 가진 반도체·바이오·2차전지 등 신산업을 규제 완화로 육성하고 주주 환원, 거버넌스 혁신 등 주주 친화 정책을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 결국 국내 주식시장을 신뢰할 수 있는 매력적인 투자처로 만드는 정공법이 해답이다. 서학개미에게 화살을 돌리기에 앞서 왜 그들이 떠났는지 먼저 돌아보는 게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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