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을 거짓과 바꿀 수 없었던 비전향장기수 박희성 선생 끝내 타계

2024-10-28

비전향 장기수 박희성 선생이 27일 오후 5시쯤 세상을 떠났다. 향년 90세. 서울 낙성대 만남의 집에 거주하고 있던 선생은 2년 전부터 혈액암 투병 중이었다. 선생은 금광으로 유명한 평안북도 박천군 동남면 송봉동에서 2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인민군에 입대해 3개월간 훈련을 받은 후 전투에 투입되었다. 일명 따발총과 식량 등 군장 무게만 45kg에 달했다. 몸무게가 38kg일 정도로 허약했던 16살 소년이 감당할 만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선생은 꼬박 3년을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제대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트럭 운전과 이동영화관 영사기사로 일했다. 22살에 결혼해 아들을 하나 두었다. 선생은 27살이 되던 해에 대남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 “연락선 기관사로 서해안으로 내려오던 중에 발각돼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오른팔과 엉덩이에 총상을 입고 수류탄을 뽑았는데 불발되고 말았습니다. 생의 기억들이 한순간 환영처럼 지나갔습니다. 결국 개펄에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선생은 1962년 6월 1일 경기도 화성 남양만에서 체포되었다. 총상 치료를 마친 선생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집행을 앞두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대전, 전주, 광주교도소에서 27년을 복역한 후 1988년 12월에 출소했다. 유신 치하 혹독한 전향공작과 7·4공동성명, 5·18을 거친 27년이었다. 선생은 감옥에서 건축도장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출소한 후 선생은 곤지암과 반월, 의정부 등지의 공사 현장을 찾아다니며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살았다. “출소 후에도 20년 동안 늘 형사들이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좁은 감방에서 넓은 감방으로 옮긴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집주인들이 간첩 출신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셋방도 잘 내주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여인숙을 떠돌며 살아야 했다. 보안 관찰이 해제된 2008년 선생은 낙성대 만남의 집으로 들어왔다. 그 후 범민련과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 고문을 맡아 활동하며 통일운동에 앞장서 왔다.

빈소는 서울 을지로에 있는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 207호에 마련됐다. 장례절차는 ‘비전향장기수 박희성 선생 시민사회장례위원회’ 주최로 진행된다. 29일 오후 7시 추도식이 열린다. 발인은 30일 오전 8시 20분이다. 장지는 서울 종로구 금선사이다.

이제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는 5명만 생존해 있다. 양원진, 김영식, 양희철, 박순자, 이광근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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