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한국에는 참 다양한 색이 있었다.
뚜렷한 사계절과 음양오행 사상에 따라 방대한 색깔이 있었지만, 지금 널리 알려진 색은 오방정색, 그리고 간색 정도다. 아름다운 전통 색상이 잘 전승되지 못하고 활용도가 많이 낮았던 까닭이다.
이재만이 쓴 이 책, 《한국의 전통색》은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연구하여 펴낸 《한국전통표준색명 및 색상 제2차 시안》에 수록된 결과물을 바탕으로 한국의 90가지 전통색을 차례차례 보여주는 책이다. ‘이런 색이 있었나’ 싶을 만큼 다채로운 색깔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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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90가지 빛깔을 찾아낸 비결은 한국의 복식과 전통공예, 자연환경, 문화유산, 광물에서 폭넓게 자료를 수집한 덕분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고려사절요》, 《규합총서》 등 옛 문헌에 수록된 색채에 관한 기록을 발췌하여 함께 담았다.
시대별로 색채를 사용한 양상을 보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에는 화려하고 강렬한 색상이 주로 쓰였지만, 고려시대에는 중후하고 둔탁한 느낌의 색채가 유행했다. 책에 실린 색들은 적색계, 황색계, 자색계, 청록색계, 무채색계의 다섯 가지로 구분된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색상 몇 가지를 소개한다.
#호박색
‘호박’은 지질시대 침엽수의 수지(나무의 진)이 땅속에서 수소, 탄소 등과 혼합되어 만들어진 광물로, 우리나라에서 칠보 가운데 하나로 귀하게 여겨 여러 가지 노리개나 장식품에 사용되었다. 호박색은 호박과 같은 누런빛으로 투명한 황색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호박 갓끈’의 선풍적인 인기를 ‘사치스럽다’라며 경계하는 대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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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0)
《조선왕조실록》 정조 편에 보면, 호박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호박 갓끈은 당상관이 쓰는 것인데, 사치 풍조가 나날이 심해져서 문관ㆍ무관ㆍ음관이나 서인들조차도 호박이 아니면 사용치 아니하니 이를 바로 잡으려 한다.…”
#청현색(靑玄色)
한때 인기를 끌었던 ‘블루블랙’, 곧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색이 우리 전통색에도 있었다. 이른바 ‘청현색’으로, 깊은 청색을 내기 위해서는 쪽으로 염색하고, 어두운 푸른색을 내기 위해서는 노목과 양매로 염색했다. 전통 혼례 때 신랑은 단령포라는 자색 관복이나 청현색 관복을 예복으로 입었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도 청현색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 당상관이 남색 철릭(무관이 입던 옷)을 입은 데 반하여, 당하관은 청현색 철릭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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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보라색(灰甫羅色)
회보라색은 회색빛이 있는 흐린 보라색이다. 회보라는 고종의 배자(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와 바지, 황태자의 두루마기에 사용되었다. 얇게 간 조개껍데기를 여러 가지 형태로 오려 붙이는 나전칠기에서도 회보라색을 볼 수 있다.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 청명날과 곡우날 장강의 물을 길어 술을 빚으면 술빛이 회보라색이고 맛이 유별나다. 그것은 대개 그 철의 정기를 얻기 때문이다. …” 라고 표현했으니, ‘회보라색 술’도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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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엽색(荷葉色)
연잎의 색인 하엽색은 어두운 초록을 뜻하고, 실제로 연잎에서 채취하여 단청의 원료로 썼다. 고려시대 절에서 단청이 발달하면서 하엽색이 단청의 중심색이 되었다. 단청에서 보던 초록색이 연잎에서 채취한 ‘하엽색’이었다는 점이 이색적으로 느껴진다.
이 책은 우리 색에 대한 풍부한 고증과 활용법을 보여주며 빛깔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다. 다양한 색깔이 백과사전식으로 수록되어 있어 궁금한 색상 위주로 찾아봐도 좋겠다. 우리 색도 이토록 다양했다는 사실을 알면 전통문화도 좀 더 다채롭게 다가올 것이다.
곧 추운 겨울이 끝나면 이 책에서 보았던 갖가지 색들이 넘쳐나는 봄이 올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다양한 색처럼, 만물이 저마다 아름다운 색과 함께 피어나는 시기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