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쩍, 힐끔힐끔, 때로는 모른척…, 색깔 있는 흑백필름 매거진에 담긴

2025-11-29

흑백 사진집에도 색깔은 있다.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분홍색. 사진작가의 딸은 고인이 된 아버지의 흑백필름을 네 가지 색으로 입혔다. 2014년에 첫 사진집이 나왔다. 한영수 작가의 <서울, 모던 타임즈 Seoul, Modern Times>(2014)다. 빨간색이었다. 다음 해는 나온 <꿈결 같은 시절 Once upon a Time>(2015)은 내용과 어울리게 초록빛이다. 2년 후에 발표된 <시간 속의 강 Time Flows in River>(2017)은 푸른색, 그로부터 3년이 지나 발간된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When the Spring Wind Blows>(2020)은 제목처럼 분홍색이다.

다섯 번째 책은 꽤 시간이 걸렸다. 2025년이 11월11일에 발행된 사진집의 색깔은 갈색이다. 제목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And Life Goes on>. 한선정 한영수문화재단 대표가 문자를 보내왔다. “이번 주제를 왠지 좋아하실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ㅎㅎ”. 흠. 무슨 근거로 그런 얘기를 한 거지? 아무튼, 설렜다. 전쟁 이후의 서울을 모던한 감각으로 담아낸 한영수 작가의 새로운 사진을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는 주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한영수 작가의 사진을 처음 본 것은 3년 전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전시가 열리고 있던 서울 종로의 백아트 갤러리였다. 전쟁의 실상을 고발하는 사진도 아니었는데, 나는 전후의 서울을 기록한 한영수 작가의 사진을 보고 적지않이 놀랐다. 내 부모의 젊었던 시절은 고단한 회색빛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두터운 선입견을 허물어뜨렸기 때문이다. 나는 갤러리에 걸린 커다란 새로 사진(명동의 차도를 위풍당당하게 건너는 어느 여인의 뒷모습)을 처음 봤던 기억을 3년 전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비 내리는 어느 날, 한영수는 명동에 간다. 나는 그가 2층 다방 창가에 앉아 있었다고 상상한다. 한영수가 창밖을 내려다본다. 또각또각. 핸드백을 팔에 끼고, 우산을 받쳐 든 트렌치코트 차림의 한 여성이 길을 건넌다. 한 꼬마가 그녀 앞에 느닷없이 뛰어들지만 그녀의 단호한 발걸음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또각또각. 보행자 신호등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두 대의 세단 승용차는 정지선 앞에 멈춘다. 운전자들은 여인의 행진을 사열한다. 또각또각. 우리는 여인의 얼굴이나 표정을 볼 수 없다. 한영수가 포착한 것은 단지 여인의 뒷모습이다. 하지만 사진은 많은 상상을 하게 한다. 그녀는 어디를 가고 있을까? 사진에 찍히지 않은 운전자들은 그녀를 줄곧 쳐다보고 있을까? 위풍당당한 그녀의 발걸음 말이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서울을 담은 한영수의 사진에 남겨진 민족지학적인 정보들은 오래된 것들과 새로운 것들이 섞여 있다. 한복처럼 품이 넓고 선이 부드러운 코트, 일본식 우산, 짐꾼이 끄는 수레와 옛 마피아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승용차. 굳이 설명하자면 근대 이전의 것들과 외국의 문명이 섞여 있는 상황인데, 한영수는 이것들을 다양한 감각으로 섞어 놓는다. 이번에 발행된 갈색 사진집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 수록된 사진들도 마찬가지. 모든 사진들이 그러하지는 않지만, 시선을 붙드는 매혹적인 사진들에는 오래됨과 새로움의 긴장감이 베어 있다.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 옆이다. 한영수는 거리에서 옛 병풍을 파는 행상을 만난다. 아직은 한기가 남아있는 어느 이른 봄날이었을까? 귀까지 내려오는 모자를 쓴 노점상은 팔짱을 끼고 햇살 속에 몸을 기댄다. 그이 앞을 지나는 파마 머리의 모던 걸. 희미하게 흔들리며 포착된 여인의 실루엣은 병풍 속의 산수화와 아슬아슬하게 조화를 이룬다. 재밌는 것은 노점상의 시선인데, 그이는 이 여인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그녀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데, 그가 의도적으로 딴 곳을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문자로 표현하자면 ‘힐끔힐끔’ 정도의 단어가 맞을까? 슬쩍슬쩍 쳐다보거나 혹은 직접 주시하지 않아도 시선의 희미한 경계에서 감각할 수 있을 정도로 동공이 열려 있는 상태. 힐끔힐끔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 둘은 섞여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엄연히 계층이 다르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시절을 관통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세대 간, 혹은 재력의 수준에 따라 폐쇠적으로 변해버린 지금의 장소들과 달리 한영수의 사진 속에 담긴 공간들은 이질적인 속성들이 한 장소에 동거하고 있다. 한영수의 남다른 감각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한 장면에 담아낼 수 있는 공간 감각에 있다. 궁핍한 시절에도 삶을 긍정하는 시선이 한영수에게 있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섣부른 추측에 나는 고개를 끄떡일 수는 없다.

한영수는 자기가 있는 공간을 벗어나지 않고 다른 공간의 세계를 관찰한다. 건물 안에서 창밖으로, 거리에서 쇼윈도 너머로, 자동차 안에서 거리로, 그늘막 안에서 모래사장으로, 실내에서 비가 오는 거리로. 이층 창밖으로 보이는 명동 거리에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이 활보한다. 노점상이나 상인들의 옷차림 때문에 보이와 걸들의 모던함이 돋보인다. 우산을 쓰고 수레를 미는 사과 장수의 모습에는 삶의 고단함이라는 정보는 사라지고 알렉산드르 로드첸코의 구성주의 사진처럼 기하학적인 행태미가 드러난다. 한영수는 리얼리스트라기보다는 유미주의자였을까?

한영수는 임응식 작가의 생활주의가 유행하던 당시에 사진 그룹 ‘신선회(新線會)’의 멤버였다. 예술성보다는 일상과 노동 등 현실을 리얼하게 사진에 담고자 했다는 뜻이다. 임응식은 명동 미도파 백화점 앞에서 벙거지를 쓰고 구직 팻말을 목에 건 한 사내를 사진 찍었다. 신선회의 이형록은 남대문 시장의 구두 노점상을 사진에 담았다. 사진에 담긴 인물들은 생각보다 당당한 포즈로, 연출된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모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한영수가 찍은 엿장수도 어느 정도 그렇다. 좀 다르다면 한영수의 사진은 민족지학적인 정보로 가득 찬 임응식과 이형록의 사진과 달리 여유로운 분위기가 감돈다. 한영수는 엿장수뿐만 아니라 그가 서 있는 거리의 공기까지 찍어 냈다.

이 시절에 한영수가 유미주의자였다는 점은 어쩌면 비난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약적으로 비유하자면 ‘불행을 탐닉하는 유미주의자’라는 브라질 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두에 대한 미국 평론가 수전 손태그의 비판처럼. 넝마, 폐허, 가난과 고통의 현장을 너무 멋있게 사진에 담을 때 사진작가들은 자주 이러한 비판에 맞서게 된다. 하지만 살가두는 일갈했다. “왜 가난한 세상은 부유한 세상보다 추해야 하나?” 타인의 고통이 담겨 있는 사진을 보는 관객이 느끼는 연민은 고통받지 않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내가 속한 사람들의 고통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인 것이다.

우리가 한영수의 사진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도 살가두의 시선과 비슷하다. 한없이 가난하고 고단하기만 했다고 생각되는 시대에도 멋스러움이 있었다는 것. 한영수는 미국 선교사나 군인처럼 그 시절의 우리들을 불쌍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대의 쟁쟁한 다른 한국인 사진작가들처럼 심각하게 현실을 포착하려 하지 않았다. 한발쯤 슬쩍 물러나서, 이층 창가에 몸을 숨기고 그 시대의 분위기를 필름 매거진에 슬쩍 퍼 담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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