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일 폭설이 내린 강원도 설악산국립공원 한계령. 도로 양옆으로 설치된 철제 울타리가 기둥만 꽂힌 채로 뻥 뚫려 있다. 지난달 철거를 시작한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방역용 울타리다.
울타리를 따라 이동하던 중 표지판 옆에서 움직임이 포착됐다. 눈 덮인 숲에서 아직 뿔이 나지 않은 새끼 산양 한 마리가 고개를 들었다. 털은 눈이 녹은 물에 젖어 있었고, 먹이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동행한 정인철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무국장이 조심스레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산양은 눈을 헤치면서 다시 산을 올랐다. 정 국장은 “2년 전 겨울에 일어난 산양 떼죽음 이후 살아남은 개체가 낳은 새끼로 보인다. (안전을 위해) 산 안쪽으로 유인해서 올려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설악산국립공원은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 1급인 산양의 핵심 서식지다. 산양의 생존을 위협했던 철제 울타리를 설악산부터 철거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앞서 정부는 지난달 설악산 미시령과 한계령 일대 3.9㎞ 구간의 ASF 차단 광역울타리를 철거했다.
2019년부터 설치된 ASF 차단 울타리는 산양에게 ‘죽음의 울타리’가 됐다. 전국에 설치된 총 1630㎞의 광역 울타리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저지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장기간 유지되면서 생태계의 단절을 유발했다. 특히 2023~24년 겨울 강원도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리면서 1000마리 이상의 산양이 목숨을 잃었다. 먹이를 구하기 어려워졌으나, 울타리 탓에 제때 이동하지 못한 산양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설악산 일대 산양 개체 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 정 국장은 “산양은 다리가 짧고 배에 털이 없기 때문에 눈에 닿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체온이 떨어진다”며 “울타리 안쪽으로 눈이 깊게 덮여 있어서 한번 빠지면 허우적거리면서 저체온증이 올 수 있어 위험하다”고 설명했다.

울타리가 열리자 산양 생태계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국립생태원이 지난해 5월부터 1년 동안 모니터링한 결과, 부분 개방한 울타리 44곳에서 산양의 집단 이동이 관찰됐다. 특히, 1월과 2월 산양이 개방 구간을 통과한 것만 각각 900건에 달했다. 윤광배 국립생태원 선임연구원은 “완전 철거가 이뤄질 경우 이동 경로가 회복되고, 개체 생존율도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정부는 내년부터 3단계에 거쳐 울타리를 단계적으로 철거하기로 했다. 우선 설악산·소백산 등에 설치된 136.6㎞의 울타리를 내년부터 철거한다. 생태적 가치가 높고 산양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이다. 본격적인 철거 작업은 내년 봄 이후로 예상된다. 때문에 올겨울이 산양에겐 생존의 마지막 고비가 될 수 있다. 정 국장은 “폭설에 대비해 산양 구조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ASF 대응도 울타리 중심에서 벗어나 생태계 보전과 효율적 방역을 동시에 고려한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영철 강원대 산림과학대 교수는 “국내에서 ASF가 토착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방역도 포괄적 체계에서 벗어나 농가가 밀집한 지역을 중심으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