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가 열어준 문, 들어갈 준비 됐나요

지난주 엔비디아가 한국 정부와 기업에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장을 공급한다는 소식이 온 나라를 뒤흔들었습니다. 전 세계가 AI 핵심 자원인 GPU 확보에 혈안이 된 가운데, 한국이 우선 공급 대상에 포함됐다는 사실은 기대감을 한껏 부풀렸습니다. 회장님들과의 ‘깐부 회동’에서 반팔 티셔츠를 입고 치킨 접시를 나르던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의 소탈한 모습은 이번 딜의 극적 효과를 끌어올렸죠. ‘AI 대전환’이 금방이라도 실현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기대는 곧바로 주식시장에 반영됐습니다. 엔비디아가 GPU 생산에 필수적인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국내에서 공급받겠다고 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가장 큰 수혜주로 지목됐습니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국회 시정연설에서 AI를 28번이나 언급하며 강력한 정책 드라이브를 예고했죠. ‘잿빛’이던 한국 경제 전망도 반전되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장밋빛 기대 뒤에는 불안함도 없지 않습니다. 기업들의 표정이 어딘가 미묘한 걸 보면 그렇습니다. GPU가 수십만장 들어와도 이를 운용할 사람이 없다는 걱정이 나옵니다. AI 인재 부족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지만, 정작 ‘대형 호재’와 함께 당면한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국내 석·박사급 이공계 인력의 40% 이상이 3년 이내 해외 이직을 고려하고 있다는 한국은행 조사 결과는 충격적입니다. 빠져나가는 인재를 잡지 못한다면, GPU 26만장이 아니라 260만장이 들어와도 소용이 없겠죠. 하드웨어가 아무리 좋아도 이를 굴릴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인프라도 문제입니다. GPU는 전기 먹는 괴물로 불립니다. AI 연산을 제대로 굴리려면 천문학적 전력이 필요한데, 전력 수급 구상은 명확히 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사이 대형 원전 건설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죠. AI 경쟁력 확보라는 숙제가 어느새 ‘원전 찬반’이라는 익숙한 전선으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해외 변수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엔비디아의 최신 AI 반도체를 특정 국가에 판매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언급했는데요. 글로벌 공급망을 또다시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GPU 공급이 국제정치의 도구가 되는 순간, 한국이 얻은 ‘우선 공급’이라는 호재는 한순간에 바뀔 수도 있습니다.

AI 대전환은 분명 기회입니다. 하지만 기회가 모두에게 열려 있는 건 아닙니다. GPU 확보에 성공했다고 해서 AI 강국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재, 전력, 정책, 외교 등 어느 하나 빠져도 경쟁에서 밀릴 수 있습니다.

26만장의 GPU는 축복이 될 수도,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AI 전환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을까요. 지금 필요한 것은 들뜬 환호가 아니라 냉정한 점검입니다. ‘GPU가 온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능력을 갖추느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