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완서는 1986년 4월에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사망하자 <제2의 성>이 있어 “여성들이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는 조서를 발표할 만큼 1980년대에 페미니스트로서 각성한 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는 중산층 가족의 속물성을 까발리는가 하면, 중산층 여성을 가부장제로부터 수혜를 받지만, 그 대가로 인간성이 짓눌리는 양가적 존재로 주목했다. 다른 한편으로 박완서는 일제강점기부터(‘엄마의 말뚝 1’) 한국전쟁기를 거쳐(‘엄마의 말뚝 2’) 1990년대 초에서 종결되는(‘엄마의 말뚝 3’) 가족사 연작 <엄마의 말뚝>을 통해 자전소설 창작을 본격화했다.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하지만 ‘엄마의 말뚝 2’는 한국전쟁기 오빠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내전의 정치가 친족의 도덕 공동체와 마을 공동체에 위기를 초래함으로써 인간의 영혼과 가족의 삶에 깊은 상처를 드리운 사건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이 글에서 다룰 ‘엄마의 말뚝 1’은 성인이 된 여성 화자가 오래전 엄마의 손에 이끌려 전통적 공동체인 ‘박적골’(경기도 개풍군)에서 찢겨나가 서울살이를 시작했던 유소년기를 회고하는 이야기다. 어린 ‘나’는 낙원에서 추방당해 짐꾼조차 고개를 내젓는 ‘상상 꼭대기’인 현저동의 빈민으로 전락하고, 무한한 사랑을 주던 조부모와도 떨어지게 된다. ‘나’는 엄마의 출세 압력에 시달리는 꼬마 죄수가 된다.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마음먹은 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여성이 되라는 엄마의 압력으로 자유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나’는 사대문 밖에서 살지만 위장 전입해 사대문 안의 명문 초등학교에 다니게 됨으로써 남모를 비밀을 짊어진 외톨이가 된다.
이 소설은 가족에 대한 회고가 한 개인의 내밀한 사생활뿐 아니라 사회의 변동을 설명하는 방법론임을 보여준다. 유호식에 의하면 사회유동성이 증가하고 개인의 자아의식이 급변하면서 자서전은 근대적 의미에서 하나의 장르로 발전하는데, 특히 가족은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동일시와 차별화가 이뤄지는 공간으로 자주 호출된다. 1980년대가 특별한 것은 신성화된 가족 담론을 뚫고 가족에 대한 비판과 고발이 비로소 성토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가족은 공동체와 이웃을 위협하고 사회의 불의에 무관심한 속물들을 양산시키는 배양소로 지목됐다. 동시대 여성 작가들과 더불어 박완서는 가족과 여성이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를 온존시키는 ‘에이전시(Agency)’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지 의심하며 비판적인 여성 주체를 깨우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작가는 가족이 두른 신성함의 외피를 찢고 내밀한 가족 경험을 고백한다.
욕심과 능력을 가진 억척 엄마들에 대한 헌사
‘나’의 엄마는 남편이 죽자 시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녀들을 데리고 ‘대처’로 출분한다. 복통을 앓던 남편이 무당 굿이 아니라 양의의 치료를 받았더라면 죽지 않았으리라는 사무친 원한으로 도시, 즉 근대 공간으로 뛰어든다. 엄마는 기생 옷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 기어이 ‘괴불마당’ 집을 마련해 서울에 ‘말뚝’을 박는다. 인류학자 낸시 에이블먼은 사회변동에 대한 통계는 주로 남성의 공식적인 생산활동만을 기록함으로써 한 사회가 전근대에서 근대로 변모하는데 여성이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을 놓쳤다고 꼬집은 바 있다. ‘나’의 엄마는 가족의 신분 이동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한국의 근대화를 가속화한 근대화의 숨은 주역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 ‘한국 근대사=아버지들의 수난사’로 기억돼온 젠더 편향된 역사 기억에 대한 바로잡기이자 ‘억척 어멈’들에 대한 헌사다. 그러나 박완서는 어머니의 역사를 손수건을 움켜쥐어야 할 사모와 죄책의 멜로드라마로 각색하지 않는다. “감추어진 추악한 것 속에서 소설의 거리”를 주워올리되 “정이 앞서지 않는 냉혹한 마음으로 추리고 다듬고 지켜졌을 때만 비로소 명색이 소설”(이상문학상 수상소감)이라는 신조가 암시하듯이 작가는 가족과 모성애에 관한 진부한 찬사를 늘어놓기는커녕 안티멜로드라마를 선택한다. 한국문학사 속에서 모성애라는 상상의 관념이 투사됨으로써 밋밋하고 납작하게만 그려졌던 어머니는 비로소 ‘성격’을 가진 인간으로 재창조됐다. 독자는 여성으로서의 욕망을 비워낸 채 자식을 종교처럼 숭배하고, 자식의 입신출세를 통해 시대와 성별 제약으로 좌절된 자신의 욕망을 대리 실현하고자 하는 욕심과 능력을 가진 어머니들을 마주하게 됐다.
“어머니가 세운 신여성이란 것의 기준이 되었던 너무 뒤떨어진 외양과 터무니없이 높은 이상과의 갈등, 점잖은 근거와 속된 허영과의 모순, 영원한 문밖 의식, 그건 아직도 나의 의식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의식은 아직도 말뚝을 가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멀리 벗어난 것 같아도 말뚝이 풀어준 새끼줄 길이일 것이다.”( 박완서 ‘엄마의 말뚝 1’, 60쪽)
‘말뚝’이 사회와 여성에 던진 무서운 질문
박완서는 세상과 사물의 리얼리티를 온전히 확보할 때 활기 넘치는 삶이 저절로 따라온다면서 여성에게 관찰의 중요성을 일깨운 버지니아 울프처럼 딸의 시선을 통해 엄마의 이중성과 모순을 가차 없이 들춰내는 신성모독을 시도한다. 딸의 회상을 통해 ‘엄마’는 “너무 뒤떨어진 외양과 터무니없이 높은 이상과의 갈등, 점잖은 근거와 속된 허영과의 모순, 영원한 문밖 의식”에 사로잡힌 존재로 그려진다. 엄마는 도시라는 근대 공간을 이상화하면서도 현저동의 이웃들을 ‘바닥 상것’이라고 경멸하는 낡은 양반의식의 소유자다. 또한 엄마가 나에게 강요하는 ‘신여성’은 지식 자본을 바탕으로 사회적 성공을 거머쥔 엘리트 여성을 의미할 뿐 가부장제에 반역하는 ‘불온한’ 여성 전위와는 거리가 멀다. 이렇듯 냉정하기조차 한 모성 재현은 사회의 병적 현상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여성 혐오와는 거리가 멀다. 작가는 엄마를 통해 우리를 어쩌면 영원히 ‘문밖’에 세워둔 채 ‘문안’에 대한 조바심과 열등감에 휩싸이게 만드는 서울, 즉 근대 도시의 질서를 가시화하고자 한다. 서울은 사대문을 중심으로 문(門)안과 문(門)밖으로 양반과 상놈의 공간이 나뉘는 전근대적 차별 위에, 재산·주택·학벌 같은 신분 재화들을 중심으로 주류와 비주류로 새롭게 인간을 위계화하는 중첩된 차별의 장소로 그려진다. 근대는 평등을 선언하며 신분 경쟁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지만, 바로 그 평등성 때문에 그 희망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든다는 것은 근대의 역설이다. 자유의 환영이 유혹하지만, 출생과 재생산의 특권이 존재하기 때문에 ‘문’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주변인의 마음은 열망과 의혹으로 혹사당한다. 일찍이 구유럽의 정치인 토크빌의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개화된 신대륙의 사람들에게서 본 “눈썹 위의 검은 구름”, 즉 세속적 행복과 출세를 위한 조바심 섞인 욕망과 불안은 가난한 엄마의 의식 내용이었던 것이다.
강의실에서 이 소설을 함께 읽으며 무심코 학생들에게 엄마가 대처의 질서에 맹종하며 내 목에 올가미를 씌우고, 문안을 향해 엉덩이를 냅다 걷어찬다면 어떻겠냐고 물은 적이 있다. 철학을 전공하는 여학생이 들려준 답변은 뜻밖이었는데 자신의 엄마는 문안과 문밖으로 구획된 세상에 대해 염증을 토로할 만큼 고상하지만, 자신은 문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평생 변두리만 서성댈까 봐 조바심에 사로잡힌다면서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불안과 그 진부한 내용을 마주했다는 고백을 들려주었다.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는 질문으로 독자에게 자아와 사회에 대한 반성적 사색을 유도함으로써 이 소설은 위대한 고전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제아무리 멀리 벗어난 것 같아도 말뚝이 풀어준 새끼줄 길이일 것이다”는 문장은 민주화운동기인 1980년대에 박완서의 문학이 당대 사회와 여성에게 던진 무서운 질문으로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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