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옥해서 자유인으로 살 것인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인가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뒤탈이 없는 조건으로 탈옥을 제안받았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탈옥을 통한 자유인의 삶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삶 중에 어떤 것이 더 나은 삶인가? 플라톤 초기 대화편의 백미를 이루는 <크리톤>(플라톤 저, 이기백 역, 아카넷)은 우리에게 딜레마 상황에서의 윤리적 자세, 나아가 법의 존재 그리고 국가에 대한 시민의 자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크리톤>은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소크라테스와 감옥을 찾아온 그의 동갑내기 친구 크리톤이 소크라테스에게 탈옥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주로 화자가 되어 탈옥하면 안 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탈옥을 집요하게 권유하는 크리톤의 설득에 소크라테스는 거침없는 말로 상대의 의지를 꺾어버린다. “자네(크리톤)의 열정이 정당함마저 갖추었다면 커다란 가치를 지녔을 것이네. 그러나 정당성이 결여된 열정은 강할수록 해로운 것이라네.” 이렇게 포문을 연 소크라테스는 법과 국가에 대한 견해 그리고 시민의 의무에 관해서 대화의 형식을 취하지만 일방적인 연설을 늘어놓는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통해서 그의 정치철학과 법철학이 어떠한지를 확인하게 된다.
사형선고에 탈옥이라는 탈법으로
대응하는 게 보복적 정의관일까?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배심원들에게 국가 권력의 폭력성과 부당함을 조목조목 따져 물으면서 배심원들을 후려치는 소크라테스의 강인함은 <크리톤>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국가를 찬양하고 감사하며 순응해야지 어떻게 감히 탈옥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정의롭지 못한 처사라고 차분하게 풀어내는 모습에서 삐딱한 소크라테스는 보이지 않는다.
혹자들은 <크리톤>에서 보여준 이러한 국가와 법률에 대한 순종적인 태도에 당황하면서 <크리톤>을 위작(僞作)으로 의심하기도 한다. 나도 <크리톤>에서 보여주는 소크라테스의 논리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옥은 부끄럽지 않은 삶을 강조해온 나(소크라테스)답지 않다”는 그의 말은 맞지만 “탈옥은 시민을 길러주고 자유와 행복을 지켜주는 숭고한 국가에 대한 일종의 배신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논리는 쉬이 동의가 안된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라는 국가적 폭력을 탈옥이라는 탈법으로 대응하는 것은 보복적 정의관이기에 옳지 못하다는 논리를 펼친다. 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국가의 폭력에 저항하는 것도 보복인가 아니면 권리이자 의무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국가를 통해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니를 맞이하게 되었고 그대를 낳게 된 것이 아니오.”, “아버지나 어머니를 폭행하는 것이 불경한 것인지, 아닌지, 또한 그것보다 조국에 대해 폭력(탈옥)을 가하는 것은 훨씬 더 불경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말이오.” 이 같은 나이브한 논리는 지금 현대국가의 시민적 관점에서는 수긍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민의 자유와 권리는 국가보다 더 숭고한 가치가 되었으니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지키고자 한 것은?
한때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소크라테스의 신념처럼 잘못 해석되어 지금까지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25개의 대화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아전인수식의 해석은 이제는 그만 멈춰야 하지 않을까?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법을 준수하고 지키고자 한 것은 당시 문명국가로서의 최초의 시민 참여로 이루어진 아테네 공화정에 기반한 법률과 제도를 지켜야(순응해야) 한다는 말이지 현대국가에서 일어나는 파시즘 체제의 폭정과 악법에도 순응하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탈옥의 문제를 정의의 문제로 확장해가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통찰은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속에서 시민의 의무는 무엇이고 불의에 저항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탈옥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소크라테스에게는 자신의 양심과 신념을 지켜낼 것인지, 양심을 저버리고 오염된 영혼을 가질 것인지의 절박한 문제였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탈옥과 관련하여 세상 사람들이 찬성하든 말든, 형벌이 지나친 것이든 아니든, “불의를 행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나 악하고 추하다”고 밝히면서, “불의로 해롭게 되고 정의로 이롭게 되는 그것이 파괴되어도 과연 사는 보람이 있을까?”하고 묻는다.
지금 이 나라는 정의가 무너지고 강자의 힘이 곧 정의인 시대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개인적 탈옥을 정의의 문제로 귀결시킨 소크라테스의 도덕적 통찰과 혜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잘(훌륭하게) 사는 것”이고, “잘사는 것은 곧 아름답게 산다는 것과 바르게(정의롭게) 산다는 것과 같다”고 강조한 소크라테스의 경구는 혼돈의 시대를 헤쳐가는 등불이 되어 준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탈옥했다면 역사는 소크라테스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그런 삶이 아닌, 잘 살고 아름답고 바른 삶을 위해 크리톤을 만나보자.
이해규 인문학협동조합 망원경 회원 남목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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