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금붕어를 키우는 오지선다형 수능

2025-12-16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이 이달 5일 이재명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던진 화두가 서늘한 충격을 주고 있다. 그는 초인공지능(ASI) 시대를 언급하면서 “이제는 인류가 금붕어가 되고 AI가 인간이 되는 그런 모습이 펼쳐질 것”이라고 했다. 인간보다 1만 배 더 똑똑한 AI가 등장했을 때 인간의 지적 능력이 금붕어의 그것처럼 미미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섬뜩한 금붕어 쇼크가 최근 논란에 휩싸인 우리 대입 제도 수학능력시험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등장한 AI 모멘트 이후 우리는 어느 때보다 지식에 접근하기 쉬운 시대를 살고 있다. 인류가 쌓아온 방대한 지식이 몇 초간의 키보드 입력으로 효율적으로 재구성돼 눈앞에 펼쳐진다. ‘답을 찾는 기술’은 점점 인간이 아닌 AI의 몫이 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수능은 AI가 잘하는 이 능력을 인간과 경쟁시키고 있다. 올해 수능에서 논란을 빚은 국어 영역 17번 문항을 짚어보자. 이마누엘 칸트의 ‘인격 동일성’이라는 고도의 철학적 사유를 다루면서도 정답을 찾는 과정은 텍스트 간의 피상적인 일치 여부를 가리는 ‘숨은그림찾기’ 수준에 머물렀다. 인간의 사유는 사라지고 정답을 찾는 요령만 남은 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낡은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을 쓰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사교육비 총액은 약 29조 2000억 원으로 국가 전체 연구개발(R&D) 예산(26조 5000억 원)보다 수조 원이 많다. 교과 과정을 벗어난 문제 출제, 반복되는 난이도 논란 탓에 사교육 시장은 더 견고해진다. 뉴욕타임스(NYT), 영국 BBC, 텔레그래프 등 영미 언론까지 앞다퉈 한국의 수능 영어 영역 난이도 논란을 다룰 정도다. 이런 현실에서 4세·7세 영어 유치원을 규제하겠다고 나서는 교육 당국의 움직임에 헛웃음이 나온다.

최근 기업 채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 또한 수능과 같은 교육 제도로 길러진 인재에 대한 경고음이다. 신입 공채의 문은 닫히고 경력직 채용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과거 대졸 신입 사원에게 기대했던 역량은 빠르게 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윗사람의 지시를 정확히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는 정확히 현재의 오지선다형 수능이 길러내는 능력과 일치한다. 하지만 이제 그 역할은 ‘에이전트 A’가 월 2만~3만 원의 비용으로 실수 없이 해낸다.

물론 수능이 가진 현실적 가치는 외면할 수 없다. 채용 담당자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가 있다. 실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의적인 비판과 대안 제시 능력이지만 이는 결코 기초적인 성실성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말이다. 수능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사회에서 성실성과 인내심을 증명하는 ‘트랙 레코드’ 역할을 해왔다. 하기 싫은 공부를 참아내고 시스템의 요구에 부응해 낸 성취는 곧 조직에서의 책임감으로 연결된다. 기초 체력이 없다면 AI라는 첨단 도구 역시 무용지물에 불과할 수 있다.

결국 AI 시대 수능의 유효성은 ‘없애느냐, 살리느냐’보다는 진화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성실성의 가치는 지키되 평가의 형식을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 정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논리를 이끌어내는 ‘논서술형 평가’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식의 양을 묻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통합하는 능력을 물어야 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AI를 의심하고 훈련시키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질문하는 자(questioner)의 역량이다.

손 회장은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 경제를 살릴 방안을 묻자 “첫째, 둘째, 셋째도 브로드밴드”라고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을 만났을 때는 AI, 그리고 이 대통령에게는 ASI를 강조했다. 그의 예측은 대체로 시대의 흐름과 일치했다. 1998년 브로드밴드, 2019년 AI, 2025년 ASI. 기술의 화두는 세 번이나 바뀌었다. 그런데 교육은 어떤가. 1994년 수능 도입 이후 31년, 우리는 여전히 오지선다형 정답 찾기에 머물러 있다. 기술이 비약적으로 도약하는 동안, 교육은 제자리다. 금붕어를 기를 것인가, 질문하는 인재를 기를 것인가. 이재명 정부가 풀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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