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 결혼식 대신 남친 사십구재…춤바람 난 할머니의 '첫여름'

2025-08-13

"큰 상도 받고 관객과도 만나고, 이 모든 게 돌아가신 할머니가 주신 선물 같아요."

단편 영화 '첫여름'을 연출한 허가영(29) 감독은 요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했다.

영화가 올해 칸 국제영화제 라 시네프 부문에서 한국 영화 최초로 1등상을 받은 데 이어, 지난 6일 메가박스 단독 개봉으로 국내 관객과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허 감독의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졸업 작품인 '첫여름'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춤 바람 난 할머니의 자아 찾기다. 손녀의 결혼식 대신 콜라텍에서 만난 연하 남자친구 학수(정인기)의 사십구재에 가고 싶은 영순(허진)의 이야기를 그렸다.

남편의 병 수발을 하던 영순은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봐 준 유일한 사람인 학수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깨닫는다. 그리고 늦게나마 할머니·엄마·아내가 아닌 자신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영순 캐릭터는 허 감독의 외할머니에서 비롯됐다. 할머니 이름을 엔딩 크레딧에 새겨넣은 이유다.

5일 서울 삼성동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만난 그는 "대학생 시절, 할머니가 들려준 남자친구 이야기가 연애담 같기도, 트라우마에서 살아남은 여성의 영웅담 같기도 했다"며 "자신에 대한 혐오와 연민 속에서도 춤을 출 때 가장 나다워진다며 꿈꾸듯 말하던 할머니의 상기된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후 할머니의 사십구재에 참석한 허 감독의 귀에 불경 소리가 콜라텍 음악처럼 들렸고, 머릿 속에는 대웅전에서 자유롭게 춤추는 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는 "'첫여름'은 이 장면에서 시작됐고, 이 장면을 위해 질주하는 영화"라며 "영순의 찬란한 시절을 되찾아주고 싶다는 의미에서 제목을 '첫여름'으로 지었다"고 말했다.

영순은 결혼을 앞둔 손녀에게 란제리 세트를 선물하며 "너를 즐겁게 해주는 남자가 최고"라고 말한다. 딸에게는 자신이 가부장제 그늘에서 얼마나 숨 막히게 살아왔는지 토로하며, 앞으로 춤추며 신나게 살 거라고 선언한다.

허 감독은 "한국 영화에서 영순 같은 캐릭터는 한번도 등장한 적 없었다"면서 "관객들이 '할머니' 영순이 아닌, '여인' 영순과 동행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노인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욕망은 마치 증발해버린 것처럼 무시돼 왔죠. 노인에 대한 개념을 깨부수고 뒤집고,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허 감독은 '늙어본 적 없는' 20대 여성이 노인을 대상화하고 평면적으로 그렸다는 지적을 받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쓸 때 카바레·콜라텍에서 살다시피 하며 노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노인 분들과 커피, 맥주를 마시고 함께 춤도 추면서 많은 얘기를 들었어요. 콜라텍 의상과 음악, 노인들의 대화 소재, 오후에 한정된 영업시간 등을 작품에 녹여 넣었죠.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친 노인들에게도 궁금한 걸 많이 여쭤봤어요. 열병을 앓는 듯한 간접 체험이었습니다."

영순의 남편 경철은 아내의 꿈과 욕망을 옭아매는 인물이지만, 악인으로 묘사되진 않는다. "가부장제를 대표하는 남성이지만, 그 또한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설정에서 만들어진 캐릭터다. 그는 아내의 외도를 알고 있지만, 외롭고 속상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 이런 쉽지 않은 연기를 해낸 이는 전문 배우가 아닌, 허 감독의 단골 편의점 사장이다.

"사장님 마스크가 좋아서 제안했더니, 시나리오를 읽고선 '나를 위한 배역 같다. 나도 투병 등 인생 굴곡이 많다'며 흔쾌히 응해주셨어요. 사장님과 대화하면서 경철 캐릭터를 만들어갔습니다. 휠체어 신의 디테일도 거기서 나왔죠."

영순의 나비 브로치는 영화의 주요 오브제이자 메타포로 기능한다. 영순이 콜라텍에서 학수와 만나는 계기이자, 한없이 자유롭고 싶은 꿈을 상징한다.

허 감독은 "영순이 어두운 집에 갇혀 춤을 추는 나비 같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그 나비가 콜라텍으로, 사찰로 날아가 자신만을 위해 춤추는 여정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게 나비 브로치였다"고 말했다.

그가 영순의 각성을 통해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뭘까.

"영화를 본 관객들이 그간 마주했던 노인 분들의 얼굴을 떠올렸으면 좋겠어요. 나물 파는 할머니, 지하철에서 성내던 할아버지 등 누구든 상관없어요. 그들에게도 욕망하는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동시에, 다가올 자신의 노년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그는 칸 영화제에서 '먼 나라 영화인데, 내 삶을 똑같이 그린 것 같다' '내 삶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다' '나도 늙으면 저렇게 살고 싶다' 등의 관객 반응에 큰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허 감독의 다음 목표는 장편 영화다. 인간에 대한 자신만의 시선과 이해가 담긴 영화를 만든다는 포부다.

"음악을 하며 사회적 통념과 어긋나게 살아온 50대 후반 여성, 남자친구와 정육점에서 낙태약을 밀매하는 젊은 여성이 주인공인 두 작품을 준비 중입니다. 제 장점인 캐릭터를 잘 살려, '첫여름'처럼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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