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문학 백일장]산문-학생부 최우수상 / 이서영(김해 분성중)

2024-10-07

<평등한 연약>

칼을 온 몸에 두른 듯 섬뜩할 정도로 번쩍이는 은색 빛깔의 세모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그 속에 종이가 구겨지듯 잔뜩 움츠리는 세모들. ‘김무등’이 태어난 세상은 온통 한기로 가득 차 봄도, 여름도 시린 은색의 세상이었다.

어린 시절은 무등은 은색의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무등의 아빠인 ‘김스피’는 무등에게 초록빛이었으며 빨간빛이었기에 세상이 은색인 것과 관계없이 무등의 세상은 형형색색으로 알록달록한 무지개 빛깔이었다. 또한 무등의 집은 주변의 큼지막한 집들 보다 작고, 도시의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했으나 그 어느 집들 보다 햇빛이 잘 들었으며, 꽃과 풀들이 잘 자라났다. 이 도시의 모든 빛을 빼앗은 것처럼. 그래서 인지 무등의 집의 행복은 매일이 포화상태였다. 무등은 항상 그 이유가 궁금했다. 세상은 이토록 고요하고, 한기로 가득 차 있는데 무등의 가족에게만 다채로운 색이 존재하는 이유가.

집을 나서면 세모들의 주의를 살피는 여러 눈동자만이 빠르게 교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생김새는 모두 제각각이었으나 모양 틀로 찍은 듯 같은 표정이다. 잔뜩 긴장한 눈빛과 양 어금니를 꽉 깨문 세모들의 표정들을 볼 때면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아! 그것은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본 빵을 훔친 도둑의 표정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도둑질이라도 한 걸까?

“아빠 우리 도시에 사는 세모들은 다 범죄를 저지른 거야?”

무등의 우문에 스피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동네 세모 분들이 얼마나 성실하시고 정직한데”

“그럼 왜 그렇게 굴어?”

“그건 말이야 두려움에 잠식돼서 그래”

어린 무등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눈앞을 맴도는 행복을 두려움 때문에 볼 수 없다는 것이. 또 그 두려움을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쥐고 있다는 것이.

그러나 무등의 아빠는 은색을 뒤집어 쓴 세모에게도 겁내지 않았다. 스피는 두려움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금지된 도서를 읽는 등 답답하고도 꽉 막힌 세상에서 스피는 자유로운 상태였다. 또한 스피는 매사를 생각했다. 그게 이루어지든 말든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도 옳고 그름을 고뇌했다. 학교에서, tv에서 매일 떠드는 그런 행동규범 말고도 스피에게는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었다.

“아빠는 두려움이 없는 거야?”

“두려워 살이 부르르 떨리고 뇌가 마비될 정도로. 그렇지만 두려움에게 나를 뺏기게 되면 다신 찾을 수 없어. 나의 형태마저 영혼마저 잃어버리게 될 거야”

아빠를 제외한 주변 어른들은 왕동산을 한없이 감사한 세모라 지칭했다. 그러니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만이 연약하고도 무지한 세모들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설명하시곤 했다. 그러나 무등은 그 사람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산 여러 개를 이어 불어진 듯 단단하고 날카로운 무언가를 쓴 왕동산의 눈동자는 스피와 참 달랐다. 반짝이기보단 탁했다. 그의 말은 무조건 옳다는 어른들의 말도 어린 무등은 납득할 수 없었다. 신이 아니고서야 완벽한 세모는 존재할 수 없다. 어른들은 그런 세모의 의문에 항상 ‘우리와는 달라’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린 무등의 눈에는 모두 같아 보였다. 왕동산 역시 세모들과 같이 두 눈이 있었고 팔과 다리도 세 개가 아닌 두 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질문을 할 때면 할머니와 엄마의 걱정 어린 눈물을 봐야했기에 그저 방으로 들어가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럴 때면 스피는 귀신 같이 그런 무등의 상태를 알아채곤 방으로 조용히 찾아와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동등하다고 속삭이셨다. 모두 조금씩 다를 뿐 더 우월하거나 열등한 존재 따위는 없다고 하셨다. 그러니 절대 이기지 못할 것도, 또 완전하게 이길 것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어린 무등은 누군가를 완전히 이기지도 그렇다고 지지도 못한다는 이율배반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말을 믿고 살아가고 싶었다. 지금 보다 반짝이는 세상의 도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기에….

숱한 의미 없는 계절 바꾸기가 일어났고, 무등은 금세 14살이 되었다. 14살이 된 무등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등의 하나 뿐인 편인 아빠를 은색의 세상이 앗아 가버렸다는 것이다. 마트를 갈 때나 봤던 은색의 세모들이 무등의 집을 거세게 밀고 들어와 무등 가족의 모든 빛과 나무와 꽃들을 빼앗아갔다. 무등은 맨발로 집으로 뛰쳐나와 제발 누가 좀 아빠 좀 구해달라고 울부짖었다. 무등의 발에 느껴지는 거친 흙과 돌들은 날카로운 세상에 베이는 아빠를 대변하는 듯했다.

“다락방 이모, 저희 아빠 좀 구해주세요”

듬직하기 만 했던 무등의 세상은 두 다리가 시멘트 바닥에 질질 끌리며, 개처럼 끌려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 이예요? 무슨 오해가 있을 거예요”

은색의 세모들은 귀도 입도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두 몸을 은색의 세모에게 이미 빼앗겼음에도 스피의 두 눈에서 두려움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무등이 본 아빠의 마지막 눈에는 오직 분노와 슬픔만이 공존했다.

“무등아 아빠는 한 점의 부끄럼도 없다.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다”

안타깝게도 세모들의 눈물과 애원은 무등의 세상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럴 힘을 가지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는 듯했다.

달빛만이 비추는 어두운 도로에는 세모들의 비통한 울음소리만 가득 매울 뿐이었다. 뼈 저리는 무력감을 느끼며, 그렇게 무등은 자유 없는 세상의 처절함을 뼈에 새겼다. 그렇게 무등의 태양은 저물어갔다.

무등의 세상이 무너진 뒤, 무등 가족들은 모든 색을 잃었다. 엄마부터 할머니 마지막으로 무등 까지 서서히 세상 밖의 세모들의 표정을 닮게 됐다.

스피의 말들은 점점 더 희미해져갔고, 가족들은 평범히 불행해져갔다. 할머니와 엄마는 스피가 자신이 상대 할 수 없는 상대와의 싸움을 고집하다 그렇게 된 것이라고. 그러니 힘 있는 사람들에게 순종하며 사는 것만이 약자가 생존하는 법이라고 이야기 하셨다. 그러나 무등은 알았다. 아빠는 그저 고문 없는, 폭력 없는 세상을 원한 것 뿐 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무등은 받아 들릴 수밖에 없었다. 눈물이 일렁이는 회색빛의 눈이 너무나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기 에. 행복은 이미 먼 과거 일인 것처럼 아득해졌지만 저항을 선택하기엔 이미 두려움이 무등의 몸을 주무르고 있었다. 무등은 정의가 아닌 가족을 위해 살아야 했다.

아빠의 목소리가 아무리 기억하려 애써도 기억나지 않는 나의 20살 겨울의 왕동산은 더는 나와 같은 세모로 보이지 않았다. 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성인 됐음에도 불구하고 반짝이는, 알록달록한 세상은 도래하지 않았다. 모두 이만하면 됐다는 만족 아니 자기 합리화,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단념 때문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세상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올곧은 믿음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줄 알았다. 세모는 너무나 연약했고, 세모인 동산은 너무나 비대했다.

27살이 된 5월의 초하루 왕궁에 커다란 불로 뒤 덥혔다. 하늘에서 실탄과 폭탄이 쏟아져도 굳건할 것 같은 왕궁의 절반이 불타 사라졌다. 금과 은, 보석들로 장식된 왕궁은 그 고귀함을 찾아볼 수 정도로 까맣게 타버렸다. 화재로 잠에 들었던 왕동산의 어린 아들이 죽었다. 온 신문과 방송에 방화범을 찾는다는 사실로 도배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경악과 공포로 물 들었을 당시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너의 목소리를 잃어버려선 안돼. 있는 힘껏 저항하며 살아가야해” 모든 세모들이, 아니 가족마저 헛소리로 치부한 말들이 자꾸만 나에게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장렬히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쉽사리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평생을 숨죽이며 살아와 그만 목소리를 내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웃집 아주머니가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후 숨죽이는 것을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었다. 숨죽이며 사는 것은 가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었다.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가는 도둑들에 대한 투쟁은 불가결 한 것 이었다. 도둑은 세모들이 아닌 왕동산이었다.

광활한 우주에서 우리는 어쩌면 가장 연약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왕동산 역시 세모였다. 그 말뜻은 우리 모두 세모인 이상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지배 할 수 없고, 지배당할 수 없는 우리는 모두 연약하다. 27년 만에 어린 시절부터 가진 의문에 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오랫동안 군림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우리가 가지지 못하는 ‘힘’을 가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우리 자신이 가진 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힘은 세모들로부터 나온다. 세상이 바뀌던 말 던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나의 자유를, 나의 아빠 스피씨의 자유를 위해 투쟁 할 것이라고.

투쟁의 결의는 이미 학교에 고요히 퍼져있었다. 우리 학교의 독서 동아리라는 ‘해야만 하는 일’을 함께 해나가는 동아리였다.

우린 모두 다른 외피를 가지고 있었으나 바라보는 것은 모두 같았다. 우리는 비록 적다면 적은 많다면 많은 세모들의 수였으나 우리들의 기백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하고 간절했다. 우리는 주로 세모들이 강제로 체포된 사례와 더불어 숨겨진 감옥 에서 만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죽음, 고문들을 조사해 포스터 물을 제작했다. 사무치게 아리고, 서러운 죽음들을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없이 묻어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동그라미 바퀴를 탔다.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바람에 몸을 맡겼다. 평소에는 그저 커다란 삼각형으로 보였던 산은 촘촘하게 둘러싼 나무들로 크게 요동치는 듯 했고, 어둠으로 덥힌 세상에 조금의 햇빛이 비쳐오는 듯 했다.

바람의 살랑거림을 느끼자 비로소 살아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한겨울의 세상을 훑는 바람은 따뜻했다. 아빠의 죽음 이후 처음 온기를 느낀 시간이었다. 차디찬 세상에 우리의 오랜 소원이 흩날리고 있었다. 세상은 그것만으로도 서서히 녹기를 시작하는 듯했다.

나의 이름 ‘무등’은 불교용어로 평등이 너무 크게 이루어져서 평등이란 말조차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아주 먼 우주에 아니 어쩌면 내 곁을 지키고 있을지 모르는 할아버지가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할아버지가 이 의미를 알고 나를 이리 부르시기로 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의도가 어떠했던 나는 태생부터 평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포스터의 파장은 엄청났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세모들의 죽음은 더 이상 남의 일이라 치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세모들도 점차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세모들은 친구와 아내 자식, 부모를 위해 투쟁해야했다. 이미 우리는 겪었다. 자유를, 주권을 가지지 못했기에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희생과 비극을….

무등은 아빠가 자신에게 처음 선물한 나뭇가지를 서랍 한 곳에서 꺼냈다. 굵고 단단한, 부끄럼 없는 어른으로 자라라고 무등의 첫 생일 날 마음속에 심어주신 것이었다.무등은 영원히 꺼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나뭇가지로 이제 불을 지피려고 한다. 희망의 불씨를. 마냥 깜깜하고 시린 이 세상을 밝히기 위해.

세모들은 모두 반짝이는 불꽃을 품은 채 궁으로 향했다. 한 발짝 한 발짝 전진하는 세모들의 거리는 모두 장중한 열기로 뒤덮여 있다. 정의가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세모들은 이것이 정의라고 생각했다. 정의를 투과한 빛은 점차 세상을 밝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의, 자유, 평등’을 외친다.

“독재 정권 물러나라”

“빼앗아간 우리들의 형제를 살려내라”

세상의 모든 빛들을 갈아 넣은 듯 크고 빛나던 왕관은 몸을 겹겹이 겹친 세모들의 앞에서 한없이 볼품없고 초라했다. 서로를 의지한 채 뭉친 세모들은 거대한 산처럼 보였다.

스피가 그렇게 갈망한 봄이 오는 중이었다. 벚꽃들이 사방으로 흐드러지고 있다. 세상은 따뜻할 수도 있는 곳이었던 것이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