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각 전역모 쓴 묘비

2024-09-28

※신문 1면이 그날 신문사의 얼굴이라면, 1면에 게재된 사진은 가장 먼저 바라보게 되는 눈동자가 아닐까요. 1면 사진은 경향신문 기자들과 국내외 통신사 기자들이 취재한 하루 치 사진 대략 3000~4000장 중에 선택된 ‘단 한 장’의 사진입니다. 지난 한 주(월~금)의 1면 사진을 모았습니다.

■9월 23일

기록적인 9월 폭우가 내렸습니다. 지난 주말 남부지역에 최고 500mm의 비가 내렸습니다. ‘기록적’이라는 수식어가 올해 부쩍 많아진 듯합니다. 국내외 사진으로 접하는 거대한 산불과 물난리, 태풍과 폭염과 가뭄 같은 재해 앞에서 나약하고 무기력한 인간임을 절감합니다.

월요일자 1면 사진은 폭우피해로 가야할지, 시치미떼듯 말끔해진 하늘사진을 써야할지 고민했습니다. 어제는 호우였고, 오늘은 파란 하늘이라면 두 장을 붙여쓰는 것이 안전하다 판단했습니다. 폭우로 인한 흙탕물의 황토색과 가을 하늘의 파랑을 대비시켰습니다.

■9월 24일

사진을 챙기는 입장에서 그날 다양한 일들이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더해 그 다채로운 이슈에 걸맞는 그림들이 척척 나왔으면 합니다. 뉴스는 큰데 마땅한 사진이 없는 경우도 많지요. 1면 사진 후보들이 다투듯 눈에 띄는 날은 드뭅니다. 아예 1면 후보사진이 보이지 않는 날도 있습니다. 당황스럽지만 ‘공란으로 나간 적은 없다’는 믿음으로 회의에 들어갑니다. 확실한 1면 사진이란 없습니다. 잡리를 잡았다가도 다른 사진에 밀리기도 하지요.

신원을 알 수 없는 이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23일 야탑역에서 흉기난동을 부리겠다’는 글을 게시했습니다. 1면 사진이 회의에서 어렵게 정해졌지만, 이후 야탑역 일대에 투입된 장갑차 사진이 들어와 기존 사진을 밀어냈습니다. 확신이 없는 날은 이게 답일까, 최선일까, 하는 질문이 따라붙습니다.

■9월 25일

이스라엘이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를 격퇴한다며 융탄폭격을 퍼부어 최소 사망자 500명이 넘는 최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1면 사진은 일찌감치 레바논발 사진을 쓰기로 결정됐습니다. 외신에서 ‘Lebanon’을 검색합니다. 전날 밤부터 현재까지 폭격으로 인한 불과 연기, 망가진 건물과 잔해더미에서 실종자를 찾는 구조대. 사망자 가족의 오열과 장례식, 피란행렬 등의 사진들이 보였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이미지에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편하게 보고, 기계적으로 사진을 골라내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멀고 먼 곳에서 외신을 통해 보는 전쟁의 참상에 아픔과 분노를 느끼지도 못합니다. 적어도 신문 1면에 내보이는 사진 한 장이 이 전쟁을 보는 독자에게 어떤 의미를 던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본 적이 있던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9월 26일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의 ‘민원사주’ 의혹을 국민권익위원회에 신고한 방심위 직원들이 자신들의 신원을 밝히고 공익신고에 나선 이유를 증언했습니다. 이들은 류 위원장의 가족과 지인들이 한 매체의 ‘김만배·신학림 허위 인터뷰’ 보도와 이를 인용한 보도들에 대해 방심위에 무더기로 민원을 넣은 점을 확인해 류 위원장이 민원을 사주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류 위원장은 되레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공익신고자들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고, 이들은 경찰의 압수수색을 받았습니다. 이날 회견에 나선 한 신고자는 “월급을 받아 가족을 건사하는 입장에서 위원장의 비리를 알리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며 “직업적 양심과 동료와 회사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으로 방관할 수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류 위원장에 대한 수사는 멈췄고, 신고자들에 대한 색출과 탄압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새삼스럽지만 세상은 정의롭지 않습니다.

■9월 27일

지난해 7월 경북 예천에서 수해 실종자를 수색하다 숨진 해병대 채모 상병의 입대 동기들이 26일 전역을 했습니다. 하루 전 다음날 뉴스를 챙기면서 이들의 전역 이후에 펼쳐질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채 상병의 묘역을 찾은 동기들이 전역모를 묘비 위에 두고 둘러서서 경례를 하는 모습이었지요. 예상한 사진이라면 웬만해선 이 사진을 넘어설 1면 사진은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림을 너무 거창하게 그렸던 모양입니다. 기대한 사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날 취재하는 동안 실제로 묘역을 찾은 동기는 두어 명 정도. 전역을 했지만 자정까지는 군인 신분이라는 이유로 해병대 차원에서 단속을 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묘비 앞에 전역모를 바치고 묵념하는 사진 속 동기의 마음과 용기가 크게 느껴집니다. 군대를 경험한 이들은 저 전역모가 얼마나 간절한지 아실 테지요. 살아 있다면 전역의 기쁨을 누렸을 채 상병, 그의 죽음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이 야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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