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 계량기 보급에 방치된 전기 검침원들···“3~5일에 한 명씩 퇴사”

2024-10-06

“검침하려고 계량기함을 열었을 때 말벌집이 있거나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경우가 꽤 많아요. 전선 연결하려고 뚫어둔 함 아래 구멍으로 들어와요.”

‘뱀 막대기’와 제초제를 실어둔 오토바이를 끌고 다니는 권영신씨(56)는 경기 연천의 17년차 전기 검침원이다. 권씨를 포함해 총 6명이 서울 면적의 1.2배에 달하는 연천군 일대를 담당한다.

지난 2일 기자가 만난 한국전력공사(한전) 자회사 한전MCS 소속 전기 검침원들은 2010년부터 시작된 ‘지능형 전력계량시스템(AMI)’의 보급으로 설 자리를 잃고 있었다. 올해 4월 기준 AMI 보급률은 전국 78% 수준에 달하는데, 나머지 22%의 지역을 검침원들이 맡고 있다. 전체적인 일감은 크게 줄어든 반면, 검침원에게 배정된 할당량은 유지돼 이들이 맡아야 할 구역이 더욱 넓어진 것이다.

이날 권씨의 오토바이는 마을 회관과 보건소를 비롯해 산속 농지·산 정상 등 전기가 있는 거의 모든 곳을 향했다. 경사 30도에 달하는 산길에 들어선 오토바이는 공사판과 군부대, 별장 몇 개를 지나더니 차량이 접근할 수 없는 길에 막혔다.

권씨는 “키 큰 풀들이 길을 막지 않으니 ‘C등급’ 길”이라며 울퉁불퉁한 돌길을 앞장섰다. D~E등급 길은 낫으로 풀을 베며 들어가야 한다. 권씨는 산속 농지 옆 전봇대의 계량기를 들여다봤다. “이런 곳에 AMI를 달아줘야 하는데, 얘기해도 안 달아줘요. 설치가 번거롭고 비용이 드니 그렇겠죠.”

곧장 권씨는 다음 검침 장소인 감악산 정상으로 향했다. ‘등산 검침’ 후 권씨가 버는 돈은 평균 1200원. 이들은 하루 평균 250곳의 검침을 완료해야 한다. 임순규 한국노총 공공노련 한전MCS노동조합 위원장은 “검침원들은 이륜차로 하루 평균 150~200km를 다닌다. 면적이 넓거나 인력이 특히 적은 곳에선 300km까지도 이동한다”고 했다.

이들은 업무에 필수적인 오토바이, 소형차 등의 주유비·유지관리비도 직접 부담해야 한다. 권씨는 “주유비, 수리비만 한 달에 40만~50만원 나간다”고 했다. 넓은 지역의 검침을 일정에 맞추기 위해선 휴일 근무를 하는 것은 다반사고, 이동하다 교통사고 등 산업재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노조는 한 해 사망 5건, 사고 100건 이상으로 추산한다. 벌 쏘임, 개 물림 사고 등은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검침원들은 AMI 보급이라는 산업전환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방치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이들은 한전MCS가 2017년 공공부문 정규직화 정책에 따라 검침 업무를 맡던 6개 용역 회사가 모여 만들어진 만큼, 검침원들이 맡을 장기적인 업무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서도 ‘검침이 없어지는데 제대로 된 신사업이 없어서 미래가 불투명하다’ ‘회사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등의 우려가 이어졌다.

퇴사자도 속출하고 있다. 임 위원장은 “올해 3~5일에 한 명씩 회사를 그만두고 있다”며 “지난 1일자 인사이동으론 벌써 정규직 3명이 퇴사했다”고 했다. 회사가 인력이 부족한 지역으로 인사 이동시키면 본래 생활권에서 크게 멀어지는 노동자들은 퇴사를 택하면서 ‘퇴사 도미노 현상’이 반복되는 것이다.

검침원들은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따는 등 자체적으로 업무역량을 쌓기도 한다. 임 위원장은 “주로 농어촌에 있는 AMI 저압설비의 경우 해당 자격증을 가지면 유지보수 업무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현재 현장직 3500여 명 중 1500여 명이 자격증을 갖고 있다. 임 위원장은 “(유지보수 업무는)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현재 AMI 설치 및 유지보수는 한전KDN이, 직접 검침 및 AMI 오류 확인은 한전MCS가 맡고 있다.

이날 기자가 만난 연천을 비롯한 경기 고양·의정부시 등 전국 곳곳 검침원들은 대국민 서비스를 제공하는 본인들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미래에 대한 근심을 표현했다. 13년차 박훈혁씨(64)는 “난 잘리더라도 젊은이들은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회사여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임 위원장도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고용 안정을 위해 만들어진 기타공공기관이 실업자를 양산하는 실정”이라며 “한전MCS 직원들은 계속 일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한전은 “한전KDN은 정보통신설비 관리를 수행할 목적으로 설립된 한전 자회사”라며 “이에 따라 AMI 통신설비 관리는 정보통신분야 관련 자격증을 보유한 KDN 노동자가 담당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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