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한국 기업이 인수한 첫 미국 조선소
트럼프 해운업 부흥 기조 발맞춰
“건조 역량 10년 내 10척 이상 확대”
“미 해군과의 협력 기대…대화 중”

지난 16일(현지시간) 방문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한화필리조선소는 과거 미 해군함의 생산 거점이자 6·25 전쟁에 투입된 USS 밸리포지 항공모함(CV-45)이 탄생한 네이비야드에 속해 있다.
조선소의 상징인 660t 규모 골리앗 크레인 위에는 한화 영문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지난해 12월 한화그룹은 북미 지역 상선·군함 건조 시장의 미래를 내다보고 이 조선소를 인수했다. 두 개의 독과 내업장, 직업훈련센터 등 쉼 없이 돌아가는 현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해운업 재건 드라이브와 관세 전쟁, 미·중 전략 경쟁 속에 주목도가 한껏 높아진 한·미 조선 협력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안전모와 고글을 착용하고 골리앗 크레인을 지나쳐 길이 330m, 폭 45m의 5번 독 쪽으로 가자 한창 건조 중인 대형 선박이 눈에 들어왔다. 미 해사청이 발주한 국가안보다목적선박이다. 완성 시 1000여명의 미 해군 생도가 탑승해 훈련을 받게 된다. 바로 옆 4번 독에서는 ‘아카디아’라는 이름이 붙은 풍력지원선을 물에 띄우는 진수식이 진행 중이었다. 당초 오는 12월 예정이었던 진수 시점이 한화 인수 이후 5개월가량 앞당겨졌다.
현재 필리조선소의 선박 건조 역량은 연간 1.5척 정도다. 과감한 설비 투자와 노하우 전수, 직원 훈련, 용접 로봇 투입 등 자동화·기계화에 기반한 스마트 야드 기술 도입을 통해 2035년까지 건조 역량을 최대 10척 이상으로 확대하겠다는 게 한화의 구상이다. 조선소 내부를 처음 언론에 공개한 이날 독을 안내한 이종무 한화필리조선소장은 “최대 장점인 대량 생산 역량을 접목해 단기간에 한국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생산성 강화의 핵심인 숙련기술자 양성은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현재 170명의 견습생들이 훈련받고 있는 교육센터 내에선 연령·인종·배경이 다양한 이들이 땀을 흘리며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 세림 야햐우이(36)는 “스타벅스에서 일하다가 이곳에 왔는데 기술을 배울 수 있어 만족한다”고 말했다.
마이크 지안토마소 한화필리조선소 인사팀 부사장은 견습생도 노조 조합원과 비슷한 수준의 임금과 연금 혜택, 유급휴가 등을 누린다고 소개하며 “장기적 실업과 저임금 상태에 놓여있던 이들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경험”이라고 말했다.

한화가 생산 역량 제고에 ‘올인’하는 까닭은 2000년 이후 미 상선 50%가량을 만들어온 필리조선소의 상선 수주를 확대하는 것은 물론,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등 특수선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한화필리조선소는 나아가 해군 함정에 대한 블록모듈을 공급하고 최종적으로 함정 건조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 이미 참여 중인 해군 7함대 유지·보수·정비 사업을 뛰어넘는 차원의 본격적인 협력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미 해운업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세계를 호령했지만 현재는 중국이 미국보다 최소 232배 높은 연간 선박 생산역량을 기록할 정도로 뒤처졌다. 특히 중국 해군력과의 격차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미국 내에서 커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미국 조선업 재건을 위한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미국 내 연안 해상 운송은 미국에서 건조된 선박에만 허용하거나(존스법) 국방·군사 관련 선박은 반드시 미국 내에서 건조해야 한다(번스-톨레프슨 수정법)는 법률 등은 외국 기업의 미국 내 조선 시장 진입에 제약 요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열세를 따라잡기 위해 조선업 역량을 갖춘 한국 등과의 협력 확대를 촉구하는 분위기가 미 정치권에서 초당적 공감대를 얻고 있다. 미 의회에는 ‘10년간 전략상선단 250척 이상 확보’ ‘미국산 선박의 LNG 수출 운송 비중 15%까지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선박법이 발의돼 있다.
데이비드 김 한화필리조선소 대표도 기자간담회에서 “궁극적으로 우리는 해군 (관련) 일에 진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해군과의 협력에 대한 ‘그린라이트’를 받았느냐는 질문에 “많은 지지를 받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해군 관련 프로그램 입찰, 정보요청 제출 절차 등을 진행하며 “해군 측과 대화 중”이라고 전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시하는 해운업 재건 및 중국에 대한 해군력 열세 극복이라는 전략적 필요를 고려하면 한·미 조선 협력의 잠재력은 앞으로도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 선박 건조 시장 1위인 한국의 경쟁력은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관세 인하를 유도하기 위한 협상 카드로도 거론된다.
하지만 당장 조선 분야 기업들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철강 및 파생제품에 부과한 50% 관세 부담을 완화하는 게 관건이다. 미 군함 건조 참여에 대비해 거제사업장에서 만든 선체 블록을 한화필리조선소에 인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이 역시 관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현재로서는 한·미 당국 간 관세 협상의 추이를 지켜보며 철강 관세가 원가 상승 등에 미칠 여파를 주시하는 상황이다. 김 대표는 “품질을 희생하지 않고도 비용을 최소화할 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