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롱, 스타머 초청으로 체커스 방문
처칠 앞세워 영국·프랑스의 단결 강조
영국의 체커스(Chequers)는 런던 시내에서 60㎞쯤 떨어진 버킹엄셔주(州)에 있는 총리 별장이다. 최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게 체커스의 ‘은밀한’ 장소까지 공개한 사실이 알려져 눈길을 끈다.
12일 스타머 총리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지난 9일 마크롱 대통령이 체커스에서 영국·프랑스 정상회담을 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게시돼 있다. 두 정상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유럽의 대미 외교 방향,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 좀처럼 무력 충돌이 잦아들지 않는 중동에 평화를 정착시킬 구상 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스타머 총리가 마크롱 대통령을 런던의 총리 관저 다우닝가 10번지 대신 체커스로 초청한 것은 각별한 친근감의 표시로 풀이된다. 이를 의식한 듯 마크롱 대통령은 ‘초대해줘 감사하다’는 뜻을 전함과 동시에 스타머 총리와 그 가족, 또 영국민 모두를 향해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취지의 덕담을 건넸다.
회담 후 스타머 총리는 마크롱 대통령을 어느 널찍한 서재로 안내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1874∼1965)이 사용한 곳이다. 서재마다 두꺼운 책이 가득 꽃혀 있는 모습에 마크롱 대통령이 감탄을 표시하자 스타머 총리는 “정말 대단하지 않으냐”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내가 대통령님을 이 방에 모시고 온 진짜 이유는 모든 것을 숨김 없이 보여주기 위해서”라며 한 개의 책꽂이 앞에 멈춰 섰다. 겉으로 보기엔 두터운 책들이 빽빽히 꽃혀 있는 것 같은데 스타머 총리가 간단한 조작을 한 다음 책꽃이 오른쪽을 잡아 당기자 놀랍게도 활짝 열렸다. 비상시 방에서 몰래 빠져 나갈 수 있는 비밀 통로를 만들고 이를 가짜 책 및 서재로 위장한 것이다. 스타머 총리는 “아주 영국적인 방식(Very British)이다. 이건 가짜”라며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깜짝 놀란 표정의 마크롱 대통령은 “우와”(Whoa)라고 나직하게 내뱉고서는 스타머 총리의 뒤를 따랐다.
스타머 총리는 체커스에 남아 있는 처칠의 다른 흔적도 소개했다. 처칠이 좋아하는 시가(잎말음 담배)를 피우거나 낮잠을 잘 때 애용했다는 푹신한 소파 의자가 그것이다. 스타머 총리에 따르면 문제의 의자는 원래 총리 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에 있었다. 그런데 처칠은 주말 등을 보내기 위해 체커스로 갈 때 늘 이 의자도 갖고 갔다. 총리가 이동할 때마다 의자를 실어 나르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의견이 비서진에서 제기됐다. 결국 똑같은 의자를 한 개 더 마련해 다우닝가 10번지와 체커스에 모두 두기로 해 지금은 양쪽에 다 있다고 한다.
스타머 총리는 마크롱 대통령에게 처칠의 의자를 보여주며 “태우던 시가 꽁초를 떨어뜨린 자국”, “낮잠을 잘 때 머리 무게로 인해 눌린 흔적”이라고 일일이 설명했다. 흥미롭게 듣고 있던 마크롱 대통령은 웃음을 터뜨렸다.
처칠은 영국의 역대 지도자들 중 누구보다 이웃나라 프랑스를 사랑했던 인물로 꼽힌다. 2차대전 발발 이듬해인 1940년 6월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패망했을 때 처칠은 프랑스 국방부 차관을 지낸 샤를 드골 장군이 런던에 머물며 ‘자유 프랑스’라는 이름을 내건 레지스탕스(항독 저항군) 세력을 이끌도록 적극적으로 주선했다. 처칠은 영국과 더불어 3대 연합국을 형성한 미국 및 소련을 설득해 나치 독일 패망 후 프랑스가 전승국의 일원으로 패전국 독일 분할 점령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프랑스가 2차대전 초반 나치 독일에 굴복했음에도 전후 생겨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에 합류한 것 역시 처칠의 요구를 미국, 소련이 수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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