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너마이트와 눈사태로 찢겨 산화된 조선인

2024-12-21

[우리문화신문=류리수 기자] 지난 기사에서는 왜 생명체가 들어갈 수도 없는 고열터널에 일본인 대신 조선인들이 들어가서 일해야만 했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뜨거운 고열로 인한 잇따른 사고들, 그리고 험준한 산속의 눈사태로 인해 어떠한 희생이 있었는지 알리고자 한다.

약 6km의 구로3 공사 전체에서 300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왔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위험한 일을 한 조선인 희생자의 비율이 높다. 고열터널에서만도 “고열터널 742m 암반을 굴착하는 동안 170명이 죽었다. 4.3m당 1명씩 사라진 잔인한 인신공양임에 틀림없다.”(《고열터널》, 196쪽)라고 밝히고 있다.

구로3 공사에서는 준비과정에서부터 벼랑에 낸 좁은 수평도로를 다니며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터널 공사에서처럼 터널 공사 중 암반에 깔리거나 광차(도롯코)에 딸려 들어가는 사고가 일어난다. 또한 불발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구로3에서도 얼굴이 아스러지고 내장이 쏟아져나와 죽거나 손발이 날라가는 일들이 빈번했다. 하지만 이 기사에서는 구로3에서만 특별하게 일어난 사고를 중심으로 소개하겠다.

(1) 다이너마이트 자연발화 폭발사고와 처리 과정

화약류취급법에 따르면, 다이너마이트 사용제한 온도는 40도인데, 기록소설 《고열터널》에는 1938년 7월 28일 구로베에서 암반온도 110도에서 공사하던 중 다이너마이트가 자동 폭발해서 8명의 노동자의 시신이 뿔뿔이 흩어졌다고 적혀있다. 조금 길지만 생생한 원문을 모아보았다.

‘갱내 발파 뒤 긴급 종소리가 울렸다. 사람들 아우성치는 소리가 갱내에 가득했고 수증기 밀도가 짙어져서 발밑도 안 보이게 되었다. 뜨거운 물이 허벅지까지 찼고 수증기에 화약 냄새가 진하게 감돌고 있었다. (가운데 줄임) 천공작업이 끝나고 화약계 4명이 절단 쪽으로 가서 24개 구멍에 다이너마이트 장전을 마쳤을 무렵 갑자기 엄청난 섬광이 번쩍하더니 폭풍과 함께 기폭음이 갱도에 가득했다. 그 사고로 화약계 4명과 그들을 뒤에서 호스로 물 뿌려주던 물을 뿌려주던 가케야 4명이 희생되었다. (가운데 줄임) 호스의 물을 멈춘 뒤 뜨거운 물이 줄어들었고 바닥에 뭔지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뜨거운 물 안에 분홍색을 띤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등불로 비춰보니 그것은 뜯겨나간 인간의 발목이었다. (가운데 줄임) 후지히라(藤平)는 당황해서 눈앞의 탕 안에 떠 있는 분홍빛을 띤 것에 시선을 되돌렸다. 간신히 그것이 내장이 쏟아져 나온 몸통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운데 줄임) 네즈(根津)는 벽에 달라붙은 살덩이를 떼어내고 뜨거운 물이 차 있는 바닥에 있는 찢어진 옷에 붙은 검은 것을 안아 올렸다. 산더미같은 바위 조각을 삽으로 무너뜨리며 그 안에서 피에 물든 것을 끌어내고 있다.(가운데 줄임) 멍석 위에 도롯코에 담긴 것을 쏟아 내렸다. 그것은 가슴부터 찢긴 상반신이었다. (가운데 줄임) 도롯코 3대가 비었고 네즈는 멍석 위에서 팔과 다리를 들고 왔다 갔다 했다. 여덟 벌의 주검을 맞추려는 것같았다.’(72~82쪽)

사고 조사 나온 도야마현과 경찰서는, 110도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한 것과 비인간적인 작업환경에 대해 경악, 분노하며 폐쇄할 것을 주장하고 중앙 내무성과 상공성에 보고했다. 그러나, 중앙으로부터 사고 재발방지 방법을 고안한 뒤 ‘공사를 재개토록 협력’하라고 지시받았다. 전쟁 준비 중인 시국의 요청이라는 명목으로 공사중지 명령이 해제되었다.

이후 다이너마이트 단열을 위해 볼링공 재료인 에보나이트를 썼지만, 점차 골판지로 바꿔 장전한 다음 작업했는데 폭발사고가 한 건도 나오지 않았다고 많은 자료에 적혀있다.

하지만, 토목학회에 발표한 일본전력의 후지이 유노스케의 논문(1938.10.23.)에 따르면 다이너마이트 자연폭발로 보이는 사고가 이후 2, 3차례 더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호쿠리쿠타임스 1939.5.10.>에서도 “전년도 폭발사고는 다이너마이트의 자연발화에 의한 것이고 그 뒤에도 같은 사고가 6, 7회 연속적으로 발생”했다고 한다. 곧 궤도터널이 완성된 1939년7월까지 시행착오가 반복되었고 고열 폭발사고도 계속 일어났던 것이다.(《구로베 저편의 목소리》, 74쪽. 재인용) 우에노 기쿠이치씨도 “당시 발파할 때 두세 명씩 부상자가 계속 발생했다.”, “작업 도중 폭발해 버리면 사망자가 발생한다.”라고 했다. (앞의 책, 72쪽)

<호쿠리쿠타임스 1938.8.30.>에서는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13명 참사”라는 헤드라인으로, 8월 28일 아조하라터널 안에서 다이너마이트가 자연발화로 폭발했다는 기사가 실렸다.(《고열터널》 소설 속 사고 날짜는 7월 28일, 8명 사망으로 기술되어 있다.) ‘반도에서 온 미나미 토키치(남경숙 35) 외 다섯 명의 토목공이 머리와 안면에 손상을 입고 무참한 모습으로 즉사’했고, ‘야마모토 세이조 외 두 명의 일본인 토목공은 빈사 상태의 중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한편, 같은 시각에 센닝다니의 히토미다이라 터널공사에서도 ‘쓰치다 다케오(손무술 38)외 세 명의 반도인 토목공들이 중상을 입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고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일곱 명의 중상자 나왔다고 덧붙이고 있다.

1938년 8월 28일 고열 속 다이너마이트 자연 폭발사고 이후 그런 사고에 대한 기사는 없었다. 하지만 증언에 따르면 이후에도 자연발화 폭발사고로 10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사상을 부상이라고 속여서 공사를 속행시켰다고 한다. 이런 참혹한 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다이너마이트 자연 폭발사고 2달 뒤 공사상황 조사차 방문한 후생성의 와카바야시는, “험한 자연을 극복해야 하는 어려운 공사였기 때문에 다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었다.”<호쿠리쿠타임스 1938.10.22.>라고 말했다.

제한온도 40도를 넘으면 사용할 수 없는 다이너마이트를 구로3에서는 암반온도 110도가 될 때까지 사용했고 자연 발화되어 최전선에서 작업 중이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몸이 산산이 흩어져서 죽었다. 이후로도 200도가 넘도록 다이너마이트를 계속 사용했고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전쟁물자를 만들기 위해 그런 처참한 죽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력발전소를 위한 공사를 밀어붙였다.

(2) 괴력 눈사태로 숙소가 사라졌다

1938년 12월 27일 한밤중에 1차 눈사태가 일어났다. 사가와구미(佐川組) 제2공구 시아이다니(志合谷) 숙소 5층 건물의 2~5층이 그대로 눈사태로 뜯겨져 시아이다니를 넘어 건너편 산등성이를 지나 구로베강을 건너 600m 떨어진 오쿠가네야마(奥鐘山) 암벽에 부딪혔다. 순식간에 84명이 행방불명되었다. (《구로베강》에는 1,000m 떨어진 것으로 기술됨. 457쪽)

이 눈사태는 일반 눈사태와 달리 어마어마한 괴력을 지닌 눈사태다. 이것은 산등성이에 차양처럼 쌓인 눈의 경사에 새 눈이 내릴 때 발생하는데, 새 눈의 눈송이와 눈송이 사이의 공기를 이상할 정도로 압축해서 낙하하다가 갑자기 장해물에 부딪히면 그 압축된 공기가 대폭발을 일으켜서 음속 3배, 매초 1천미터 이상의 속도와 괴력을 갖게 된다.

구로4댐 공사를 다룬 《구로베의 태양》에서도 괴력 눈사태로 인한 참상을 말하고 있다.

“1938년 12월 27일 한밤중에 갑자기 굉장한 눈사태가 일어나 눈 깜짝할 새에 4층 건물을 잘라서 일부는 계곡 밑에 일부는 건너편 기슭으로 날려버렸어요. 건너편 기슭은 백미터 이상이나 될까요. 주검은 다음 해 봄이 되어서야 간신히 거둘 수 있었는데 몸이 뿔뿔이 흩어져서 건너편 기슭에 부딪혀서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어요. (가운데 줄임) 78명은 죽었ᅌᅳᆯ 것으로 추정하고 수십 명 또는 그 이상이 부상했던 겁니다. - 추정이라고 하는 까닭은, 시체가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판정할 수 없기 때문도 있고 발견되지 않은 시체도 있을 테니까요. 게다가 노동자 등록을 하지 않고 신고하지 않고...... 몰래 들어와서 일했던 자도 상당했던 모양이라......(가운데 줄임) 어쨌든 말로도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지옥도라서......”(136~137쪽)

<도야마일보> <호쿠리쿠타임즈 1939.3.18.>는 조선인 사망자 37명, 행방불명자 47명, 모든 희생자 84명으로 보도했다. 처음에는 숙소 뒤편 눈더미 속에 건물이 파묻혔을 것으로 보고 몇 달간 삽으로 열심히 팠다. 그러나 다음 해 3월에 건너편 산에서 주검이 발견되었고 일부는 눈이 녹으면서 부패한 사체가 강으로 흘러나왔다.

당시 신문기사에서는 “5월 3일까지 47명 그 가운데 18명(조선인 6명)이 흘러내려 왔고 8월까지 25명이 발견되었다. ”<호쿠리쿠타임스 1939.8.31.> (《구로베 저편의 목소리》, 95쪽. 재인용)고 한다. 눈덩이와 함께 물속으로 미끄러져 떨어지는 주검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많았지만, 건물 잔해 속에 파묻힌 것을 꺼내면 파손 정도가 심했다. 《고열터널》에서는 84구의 주검을 모두 수습했다고 했지만(714쪽), 유족들에 따르면 우나즈키(宇奈月) 출신자만 하더라도 적어도 22명이 없었다고 한다.

한꺼번에 눈사태로 많은 인명을 잃은 사고 탓으로 도야마현에서는 공사중지를 명했지만 이때 희생자의 유족에게 ‘일왕하사금’(8엔50전) 이 내려왔다. 이것이 사고에 대한 일본 정부의 수습책이었다.

‘일왕하사금’은 단순한 유족 위로금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도야마현과 경찰에게도 이 공사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공사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시켜 주는 효과가 있었다. 하사금을 받고 도야먀현 야노 주지사는 “천황폐하의 넓으신 아량에 황공하고 감격스러운 마음 헤아릴 수 없을 따름입니다.” <호쿠리쿠타임스 1939.1.1.>라고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이 괴력 눈사태는 1940년 1월 9일에 아조하라다니(阿曾原谷) 숙소에도 다시 덮쳐서 숙소 윗부분은 순식간에 나무들이 잘려 숙소를 겨냥해서 꽂혀있었다. 숙소는 6층 건물인데 4층 이상의 목조건축이 불탔다.(326쪽) 희생자는 대부분 불에 탔고 거목에 짓눌리고 불이 나서 28명이 행방불명되었다. 뒷산 경사면을 따라 70~80m 구간의 나무가 사라졌는데 몸이 뿔뿔이 흩어진 자도 상당히 있었다. 흩어진 몸은 모아 놨지만, 숫자를 세기 위한 것일 뿐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열터널》, 238~239쪽)

시미즈 교수가 다수의 증언을 토대로 쓴 논문 <진설, 고열수도>에서는 숙소 파괴 원인이 눈사태로 인한 폭풍이라고 밝혔다. 이 탓에 조선인 17명을 포함한 26명이 행방불명되었고 조선인 21명 포함한 3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터널 공사 자체가 많은 희생이 따르는 위험한 일이지만, 구로3 공사는 고열지대, 눈사태라는 혹독한 자연환경에 처해있었다. 이런 특별한 자연재해 속에서의 노동은 ‘인신 공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편 기타니혼신문은 300명 이상 희생시켜서 완성한 구로3댐에 대해 ‘세계적 난공사 성공, 이 귀중한 세계기록은 기업 일본전력 지도력의 자랑과 여기에 종사한 엣추(越中: 도야마의 옛이름) 혼의 큰 자랑’(1940.11.8.)이라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이어 오늘날 일본은 구로3댐을 포함한 구로베 지역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시키려 차근차근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침략전쟁을 위해 인신 공양하면서 무리하게 추진한 구로3댐 공사는 ‘조선인 노동자 없이는 완성하지 못했다’라는 많은 사람의 증언이 있다. 내 땅을 빼앗기고 생존을 위해 유랑하다가 구로베로 흘러 들어간 조선인, 그리고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살덩어리와 피로 만들어진 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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