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은행의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 계좌에 가입 중인 30대 이 모 씨는 보다 공격적으로 연금을 굴리고 싶어 예금 일부를 상장지수펀드(ETF)로 옮기려고 절차를 알아보다 깜짝 놀랐다. A은행 연금 계좌에서 투자할 수 있는 ETF 종류는 대표 지수형 상품 등 100여 개에 불과하고 실시간으로 가격을 보면서 매수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B증권사에서는 700개 이상의 ETF를 실시간 시세에 따라 원하는 가격에 거래할 수 있는 데다 매달 원하는 만큼 적립식으로 자동 매수해주는 서비스도 운영한다는 점을 알게 됐다. 결국 이 씨는 증권사로 연금 계좌를 갈아탔다.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직접 연금 계좌를 운용해 고수익을 올리려는 수요가 증가하면서 금융투자 상품에 강점이 있는 증권사들이 고객 유치에 팔을 걷어붙였다. 특히 연금 계좌 내 ETF 운용 비중이 늘어나자 은행·보험 대비 편리한 거래와 다양한 상품 수를 지닌 증권사가 ETF를 연금의 필살기로 내세우는 양상이다.
7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미래에셋·한국투자·삼성증권 등 5대 증권사의 퇴직연금(DC·IRP) 계좌 내 ETF 비중은 20~30%대(2024년 기준)에 이른다. 별도의 운용 제한이 없는 개인연금 계좌의 ETF 비중은 최대 80%까지 치솟는다. 2020년만 해도 52조 원에 불과했던 ETF 순자산이 지난해 173조 원 넘게 불어나자 연금 계좌에서도 ETF의 비중이 증가하는 추세다. 정효영 미래에셋증권 연금컨설팅본부장은 “2019년만 해도 2%에 불과했던 퇴직연금(DC·IRP) 내 ETF 비중이 지난해에는 34%까지 늘어났다”며 “개인들이 연금 계좌에서 손쉽게 투자하면서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투자 상품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증권사 연금 계좌에서의 ETF 거래는 타 업권 대비 경쟁력이 탁월하다. 먼저 은행은 보수적인 업권 특성상 거래 가능한 ETF 수가 150여 개에 불과한 반면 증권사는 퇴직연금 계좌에서 가입이 불가능한 레버리지·인버스 상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ETF에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다. 증권사에 따라 700~800개의 상품 매매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특히 증권사 고객들은 주식처럼 실시간으로 ETF 시세를 보며 원하는 가격에 매매할 수 있지만 은행은 실시간 거래 시스템이 없는 까닭에 원하는 물량 주문 시 다음 날 일괄 매매 후 통보되는 시스템이다. 증권사 리서치센터와 연계해 투자 지역·자산에 대해 실시간 제공하는 풍부한 정보도 강점이다.
은행 적금처럼 매월 지정한 날짜에 약정 금액 범위 내에서 원하는 ETF를 자동으로 매수해주는 ETF 적립식 자동 매수 서비스 또한 증권사만의 경쟁력으로 꼽힌다. 그동안 주식 위탁 계좌와 개인연금, 중개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에서만 제공된 이 서비스는 지난해 8월 한국투자증권이 처음으로 퇴직연금 계좌에 적용됐다. 미래에셋증권과 NH투자증권도 각각 올 5월, 상반기 내 이 서비스를 내놓는다.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미국 증시가 급등하고 미국 시장에 장기 투자하면 우상향한다는 믿음이 커지면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나스닥지수 등 대표 지수 ETF를 연금 계좌에서 매월 자동 매수하기를 원하는 가입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퇴직연금 계좌 내 ETF에 투자하는 가입자들은 최근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미래에셋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5000만 원 이상 IRP 잔액을 보유한 고객 중 수익률 상위 5%의 계좌를 분석한 결과 잔액의 약 40%가 ‘TIGER 미국테크TOP10INDXX’ ‘TIGER 미국나스닥100’ ‘TIGER 미국S&P500’ ETF로 나타났다. 해당 상품들은 최근 1년간 각각 74%, 46%, 44% 상승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은행 등 타 업권에서 미래에셋증권으로 이전한 연금(DC·IRP·개인연금) 총액은 1조 6775억 원으로 전년 대비 92% 급증했다.
다만 연금 계좌 내 ETF 비중이 커지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 본부장은 “하락장에서는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며 “연금은 장기 투자 상품으로 적절한 자산 배분이 필수인 만큼 타깃데이트펀드(TDF) 등 생애 주기에 따라 글로벌 자산 배분을 해주는 상품을 중심으로 가져가되 ETF는 주변 상품으로 운용하는 게 낫다”고 강조했다.
증권사들은 로보어드바이저 등을 통해 퇴직연금 리스크 관리에 집중하고 있다. 삼성증권은 연초부터 토스뱅크와 제휴해 목표 수익률과 투자 기간 등에 맞춰 ETF 포트폴리오를 자문하는 ‘연금굴링’ 서비스를 토스 앱에서 제공 중이고 미래에셋증권은 글로벌 자산 배분 포트폴리오를 주기적으로 제공하는 ‘MP구독’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