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궁과 결탁해 폭정 일삼다 탄핵당하자 군사 일으켜

2025-06-26

역모로 흥하고 역모로 망한 영의정 김자점

“영의정 김자점은 공의(公義)의 중함을 생각지 않고 오로지 사리사욕만을 꾀해 저택의 크고 화려함이 참람하게도 궁궐에 비길 만합니다. 토지는 온 나라 안에 널려 있고 뇌물이 그 문으로 폭주하며 대단한 권세로 조정을 유린하여 관원들을 마치 노예처럼 꾸짖고 모욕합니다.”(효종 즉위년 6월 16일)

입안의 혀처럼 굴며 지난 26년간 국정을 농단하던 김자점(金自點·1588~1651)이 인조의 죽음과 함께 탄핵을 당한 것이다. 이로부터 2년 6개월 후, 간신에 역적의 죄목이 더해지면서 도끼로 허리와 목이 잘리는 잔혹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왕은 말한다.

광해군 몰아낸 인조반정 1등 공신

시비 차단하며 단숨에 영의정까지

성격 모질었지만 호란 때는 머뭇대

26년 국정 농단하다 인조 죽자 탄핵

후궁 소생 왕 세우려다 뒤늦게 발각

몰살한 소현세자 가족처럼 몰살돼

“김자점이 도성 인근에서 군병을 빌리려 했으니 무슨 짓을 하려던 것이었는가. 그는 많은 무인들과 결탁하여 조정의 신하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다. 지난 탄핵 때 민심이 분노하여 공개적으로 극형에 처해야 했지만 나는 선왕과의 정리를 생각하여 외방으로 유배 보내는 데 그쳤다. 그게 화근이었다. 승냥이의 이빨을 몰래 갈며 화살을 깊이 감추고 있었으니. 잡초를 없애려면 뿌리까지 뽑아야 마땅한 법이다. 이런 난적(亂賊)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 이보다 흉악한 자는 천고에 없었다.”(1651년 12월 20일)

왕의 북벌 계획 청에 밀고

국왕 효종이 김자점에게 이처럼 분노하는 것은 왕의 북벌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였고, 군대를 동원하여 새 왕을 옹립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역적질을 제대로 한 것이다. 조선시대 관료들 중에는 탄핵을 받고 귀양을 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이지만 살아있는 왕권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미고 발악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이런 김자점의 만용은 어디서 온 것인가.

벼슬 없는 유생에 불과하던 김자점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기는 평산 부사를 지낸 이귀(李貴)의 인척으로서이다. 그때 나이 36세였다. 둘이 인척인 것은 이귀의 딸 이예순이 김자점의 형수가 되기 때문이다. 이귀와 김자점은 인목대비를 비호하다가 광해군 측의 역모죄에 걸려 국문을 받게 되는데, 여기서 이예순이 등장한다. 김자점의 형인 남편 김자겸이 혼인 7년 만에 요절하자 이예순은 불교에 귀의하여 상당한 도력을 갖추게 된다. 당시 궁중의 내불당인 자수궁에서 왕실 여인들의 불사를 돌보던 이예순이 왕의 후궁에게 청탁을 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이귀와 김자점을 구해낸다. 극적으로 살아난 두 사람은 곧바로 반정을 주도하게 된다.

인조반정 1등 공신이 된 김자점은 그야말로 고속 승진을 하여 권력의 최정상 영의정까지 오른다. 그의 승진에 시비를 거는 자들에게는 왕의 손을 빌려 가차 없이 응징했다. “김자점은 성미가 모질고 사나웠으며 일 처리도 엄하고 급했으므로 서리들이 그를 호랑이처럼 두려워했다.” 잔인한 성품의 그에게 권력이 주어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김자점을 ‘부시(婦寺)의 충성(여자와 내시의 충성)’에 비유한 것을 보면 부드러운 아부로 강한 자의 마음을 공략하는 처세술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도 위기가 왔다. 김자점은 병자호란 때 군사를 통솔하는 원수(元帥)임에도 모호한 처세로 간언들의 지탄을 받았다.

“적이 쳐들어와도 조처하지 않은 채 혹 외진 산속에서 머뭇거리는 등 군부(君父)의 위급함을 모른 체함으로서 국가를 저버린 그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인조 17년 9월 5일)

하지만 왕은 “김자점은 비록 중죄를 지었으나 그 공은 잊을 수 없다”라고 했다. 이에 가벼운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얼마 안 있어 그는 국왕 인조 곁으로 복귀한다.

인조 총애 받은 후궁 조씨와 인척 관계

이때부터 김자점은 인조의 총애를 받는 후궁 조씨와 결탁하여 권력에의 꿈을 한층 더 키운다. 후궁 조씨는 인조 8년(1630)에 입궁하여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2명의 왕자와 1명의 옹주를 생산한다. 권력욕이 유달리 강한 조씨는 궁중의 많은 사람을 모해하고 저주하여 궁중 내에는 원인 불명의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즈음 병자호란 때 볼모로 갔던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9년 만에 영구 귀국하는데, 안타깝게도 2개월 만에 사망하고 만다. 그런데 후궁 조씨가 궁중을 장악한 상황에서 세자빈 강씨와 그 자녀들의 미래는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조씨는 성품이 엉큼하고 교사스러워서 뜻에 거슬리는 자를 모함하기 일쑤였는데, 소현세자빈 강씨를 가장 미워했다.”(인조 23년 10월 2일) ‘모질고 사나운 성품’의 김자점과 ‘질투의 화신’ 조씨는 권력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의기투합한 것이다.

소현세자가 죽자 그 아들 이석철의 원손(元孫) 자격이 박탈되었다. 종통을 교체하는 것은 왕 독단으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기에 대신들과 논의하는 형식을 취해야 했다. 원손을 내치기로 결심한 인조는 “원손은 자질이 밝지 못하여 결코 나라를 감당할 만한 재목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에 원손의 교육을 담당해 온 이식과 이경석은 “원손은 재기(才氣)가 있습니다. 어린 소년에게 어찌 장래의 성취를 미리 점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응수한다. 손자의 자질이 훌륭하다는 평가에 못마땅해하면서 성을 내기까지 한 할아버지 인조였다. 입시한 모든 신하가 종통은 세손이 받아야 한다고 하지만, 왕과 김자점은 미리 짠 계획대로 밀어붙였다. 나중에 발각된 일이지만 조씨와 김자점은 조씨 소생의 왕자 숭선군 이징(李澂)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가스라이팅 당한 인조는 한 나라를 지도할 재목은커녕 어리석은 필부만도 못한 인물이었다. 왕은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했다”는 김자점의 무함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세자 독살설이 대두되고 강빈이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궁궐은 두 파로 나뉘었다. 친 강빈파는 끊임없는 괴롭힘에 추방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 강빈. 결국 그녀는 시아버지인 임금의 처소에 가서 소란을 피우고 문안의 예를 그만두었다. 불효죄를 뒤집어쓴 강빈, 형제 4명에 오지(奧地) 유배령이 떨어지더니 다시 곤장을 맞다 죽는다. 3년 전에 죽은 강빈의 부친 강석기는 부관참시를 당하고 일흔 된 모친 신예옥은 국청에 끌려와 모진 고문을 당하다 비참하게 죽었다. 급기야 왕의 전복구이에 독을 넣었다는 조작으로 강빈은 사사(賜死)되었다. 온 가족 도륙의 옥사를 주도한 이가 다름 아닌 김자점이었다.

강빈이 사사된 지 1년 후, 그와 소현세자의 12세, 8세, 4세의 세 아들은 제주에 유배되었고(인조 25년 5월 13일) 조씨 소생의 효명옹주와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은 혼인을 한다. “옹주와 부마의 의복과 기물이 지극히 풍족하고 사치스러웠다.”(인조 25년 8월 16일) 영의정 김자점은 이제 왕과 인척이 되었다. 왕은 영의정 김자점을 옆에 끼고 도성의 인심에 대해 물었다. 강빈을 사사시킨 것에 대한 민의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때마다 김자점은 “들뜬 의논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며 도성은 평온하다고 했다. 평온하다던 여론은 인조가 승하하고 난 한 달 뒤 영의정 김자점을 겨누는 화살로 돌아왔다. 양사(사간원과 사헌부)의 주도로 영의정 탄핵이 추진되었다. 그를 바라보는 공통된 시선은 “외람되이 정승의 자리에서 사치와 방자함이 극에 달했고, 오로지 부의 축적에 진심”이었다.

달콤하지만 냉혹한 권력

김자점의 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김자점의 아들과 손자 등을 추국하자 역모에 관한 모든 것이 밝혀졌다. 아들 김익은 숭선군을 추대하려 한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손자며느리 효명옹주도 끌려 나왔다. “나와 내 어머니가 대전(大殿·효종)을 저주하였다. 일이 이루어진 후에 숭선군을 세우고자 했다” “수원에서 군사를 끌어다 거사하려고 했다”는 손자 김세룡의 증언 등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김자점의 친밀한 파트너 귀인 조씨는 ‘조적(趙賊)’ 또는 ‘역조(逆趙)’로 불리었다. 왕은 말한다. “역적 조씨야말로 화태(禍胎)다. 역적들과 서로 결탁하였고 딸을 사주하여 산천에서 기도하고 축원한 것이 모두가 임금을 저주하는 말이었으며, 무덤의 나무와 해골 가루가 모두 저주하는 도구였다. 나를 음해하려고 했지만 차마 드러내놓고 죽일 수 없어 그의 집에서 자진(自盡)토록 했다.”(효종 2년 12월 20일)

이 사건을 보는 훗날의 논평이 흥미롭다. “김자점이 강씨의 옥사를 얽어냈는데, 그의 집안 또한 강씨 집안처럼 주륙당했다. 세상은 순환하는 이치로 돌아간다.”(현종 10년 1월 5일) 간신과 역적의 대명사 김자점, 그가 걸었던 길을 되돌아보며 달콤하면서도 냉혹한 권력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