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에게 타자다

2025-09-04

한 청년이 생을 마감했다. 사망 원인에는 트라우마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고대 그리스어 ‘신체적 상처’에서 유래된 단어 ‘트라우마’는 19세기에 히스테리 환자들을 치료하며 연구하던 심리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가 심리적 충격이 신경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심리적 외상 또는 정신적 외상의 개념으로 확장됐고, 정신의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트라우마=심리적 상처’라는 개념이 대중화됐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트라우마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라는 공식 이름을 갖고 의학적으로 치료되고 있다.

이제 트라우마는 낯선 단어가 아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트라우마라는 말을 그 무게에 비해 가볍게, 자주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일상에서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쓰기 때문에 정작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트라우마는 공포, 두려움, 고통이 인간의 몸에 잔재하고 있다가 예기치 못한 어느 때 부지불식간에 나타나는 정신적 장애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어 치료받기에 아직 우리 사회는 갇혀 있다.

트라우마는 비의지적 기억에서 비롯된다. 무의식 속에 잠겨 있던 과거의 시공간이 감각을 자극받으면서 강제로 재현되는 것이다. 누구든 그 기억을 강제로 지우고 싶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비의지적 기억은 곰벌레처럼 인간의 기억에 숨어 죽은 듯이 잠을 자다가 불현듯 기지개를 켜고 고통을 일깨워낸다.

청년의 죽음을 추모하다 트라우마를 떠올리자, 이태원 참사에 대한 폭력적인 글들이 함께 기억나기 시작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이들과 조롱하는 이들, 트라우마는 어째서 애도하는 이들에게만 찾아오는가.

현실은 언제나 부조리하다. 그러나 부조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삶을 앞으로 이끄는 원동력은 타자에 대한 공감, 타자를 감싸안는 연민과 애도일 것이다.

이태원 거리를 다시 찾았다. 뜨거운 햇빛 아래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이라는 지표가 보였다. 좁은 골목에는 그들을 기억하는 그림들이 놓여 있었다.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 그리고 진심으로 애도하는 것. 트라우마는 타자에 대한 애정으로 점점 옅어질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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